[분석과 전망] ILO협약 비준, 국내 특성 고려해야
국제노동기구(ILO)는 인권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기준 관련 협약인 ‘ILO 핵심협약’을 채택하고 있다. 차별금지, 아동노동금지,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강제노동 폐지 관련 협약 등이 이에 해당한다. 1991년 ILO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한 한국은 차별금지, 아동노동금지 관련 협약 등은 비준했다. 반면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강제노동 폐지 관련 협약 등은 비준하지 못했다. 주로 집단적 노사관계와 관련된 내용이다.

문재인 정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을 국정과제 중 하나로 채택하고 지난해부터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관련 논의를 해왔다. 해고자·실업자의 노조가입 허용, 노조전임자 급여 지원 금지 규정 삭제 등이 1단계 공익위원 합의안으로 확정됐다. 그런데 이후 논의는 어려움으로 일관했다. 경영계가 핵심협약 비준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대체근로 허용, 부당노동행위 처벌 제도 개선 등 균형 있는 논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ILO 핵심협약의 중요성은 확실히 인정되고 있다. 비준 필요성도 고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최근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핵심협약의 노동조항 위반 분쟁절차 이행으로 경제보복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내야 하는 국내 노동환경을 고려하면 그 비준 결정이 쉽지만은 않다. 핵심협약의 내용은 국내 노사관계 지형을 크게 흔들 수 있는 내용이어서다. 더욱이 우리나라가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못하는 노동환경의 특성은 유럽의 노사관계에서 볼 수 없는 기업별 노조 관행이라는 점에 있다. 유럽의 노조는 기업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해고자나 실업자와 공존이 가능하다. 국내 산별노조 등에서 해고자나 실업자도 조합원이 될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기업 노조에 해고자나 실업자가 있을 경우 기업 내 노사관계 환경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노조전임자 급여지원 금지 규정 삭제도 외국에서는 전임자 급여지원 관행이 없는 게 사실이지만 국내 기업별 노사관계 때문에 더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국가는 한국만이 아니다. 미국도 연방과 주와의 관계 등 자국 내 노동환경을 고려해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경영계가 기업에 부담되는 노동제도 개선을 달가워할 리는 없지만 이들이 제기하는 대체근로 금지 규정과 부당노동행위 처벌제도 개선에도 경청할 부분이 있다. 대체근로 금지가 근로자 파업권을 훼손케 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꾸로 기업의 긴급 시설이나 국민의 생명 안전에 직결되는 업무에서는 대체근로가 필요한 것도 있다. ILO도 대체근로 전면금지 규정을 적극적으로 두라는 입장까지는 아닐 것이다. 부당노동행위 처벌제도는 이 제도의 모태인 미국이나 일본뿐 아니라 유럽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당노동행위 구제제도로 정책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동계는 ILO 핵심협약이 가지는 보편적 가치는 물론 대체근로 금지 규정이나 부당노동행위 처벌 규정 개선시 다른 나라와 달리 사용자에 의한 파업권이나 조합활동권이 훼손될 가능성 등 국내 노동환경의 특성을 강조할 것이다.

이처럼 ILO 핵심협약 비준 여부는 국내적으로 중요한 정책사항이다. 이를 위해 경사노위에서 공론화 절차를 가진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검토의 여지가 있다. 그간 핵심협약 비준시 국내 산업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제대로 된 분석이 이뤄진 것을 본 적이 없다. 경영계도 분석 과정 없이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계도 분석 과정을 거쳐야 국민들로부터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아울러 한·EU FTA 노동조항 위반으로 인한 경제보복 가능성에 대해서도 노동외교 차원의 객관적이고 냉철한 분석과 대응책 모색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