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지열 전 대법관 기도문 병풍
손지열 전 대법관 기도문 병풍
“한 건이라도 잘못된 재판을 행할까.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으로 만들까 심히 두렵나이다.”

손지열 전 대법관
손지열 전 대법관
암 투병 끝에 향년 72세 나이로 지난 5일 별세한 손지열 전 대법관(사법시험 9회·사진)이 생전에 남긴 ‘어느 법관의 기도문’에 나온 한 구절이다. 그의 고뇌에 찬 글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어수선한 법조계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그는 기도문에서 “가난한 자의 어려움과 억눌린 자의 아픔을 돌아보는 법관이 되게 하옵소서”라며 “강한 자, 부유한 자에게는 도움의 손이 많으나, 약한 자, 가난한 자에게는 저 외에 도울 자가 없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라고 썼다. 그는 1992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부임해 고문 피해자를 위해 1심보다 더 많은 금액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리는 등 약자 보호에 적극적이었다. 그를 추모하는 후배 법관들도 “재판받는 사람 입장에서 깐깐한 법리검토를 강조하신 분”으로 회고했다.

1997년 서울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재직할 때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아들 현철 씨에게 조세포탈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하는 등 정권 눈치를 보지 않는 ‘소신 판결’로 주목받았다. 그는 당시 재판장으로 "정치도 법정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언론의 바람도 법정 안으로 불어올 수 없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실과의 적당한 타협과 미지근한 판단으로 옳음과 그름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문 구절에 강직한 그의 성품이 묻어져 나온다.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미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이해와 양보와 사랑의 법을 전해 그들로 하여금 화목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옵소서”라는 표현도 있다. 법치주의의 궁극적 목표에 대해 늘 고민한 흔적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행여 오만한 언어와 행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주께서 붙들어 주시옵소서”라며 “재판하는 자의 편리와 안일을 위해 재판받는 사람들의 이익을 가볍게 처리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썼다.

손 전 대법관은 1974년 서울민사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해 2000년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 첫 대법관이 됐다. 고 손동욱 전 대법관(1964~1973년 재임)의 차남으로 사법 역사상 첫 ‘부자(父子) 대법관’이었다. 법원행정처장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을 거쳐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를 지냈다.

그가 쓴 ‘어느 법관의 기도문’은 그의 부인이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병풍(사진)으로 제작했고 2014년 12월 법원도서관(당시 관장 안철상 현 대법관)에 특별전시된 후 기증됐다. 다음은 고(故) 손지열 전 대법관 기도문 전문.

<어느 법관의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저에게 인간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법관의 직분을 허락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제 자신의 부족함과 무지함을 아오니, 모든 판단을 저에게 맡기지 마옵시고, 아버지께서 친히 판단하시되 저를 심부름꾼으로만 삼아 주시옵소서.

사람들을 재판하는 자리에 나아갈 때에 저의 마음은 심히 두렵고 떨립니다. 기도하는 중에 담대함을 얻게 하시고, 믿음으로 용기를 얻게 하옵소서.

저의 마음가짐을 호수처럼 잔잔하게 하시고, 저의 양심을 거울처럼 깨끗하게 하소서. 저의 온 마음이 선과 정의와 진리만으로 가득하기를 원하나이다. 부정한 청탁이나 부당한 간섭을 받는 일이 없도록 주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혹 유혹과 시험을 받을 때에는 주의 이름으로 단호히 물리칠 수 있게 하옵소서.

복잡하게 얽힌 인간들의 일을 올바르게 재판하는 일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간절히 비오니 주의 지혜와 총명으로 저의 우둔함을 채워 주시옵소서. 한 건이라도 잘못된 재판을 행할까,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으로 만들까 심히 두렵나이다. 저의 지혜가 도저히 당하지 못할 때에 주 앞에 엎드리겠사오니, 주께서 옳은 길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는 인간의 법은 너무나 부족하고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모든 법의 원천이 되는 주님의 법을 늘 사모하고 그 법의 인도를 받게 하옵소서. 실정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에 언제나 주님의 영원한 법을 등대삼아 그 법을 지향하게 하옵소서.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이 불같게 하옵소서. 참과 거짓을 분명히 가르는 정교한 잣대를 허락하소서. 현실과의 적당한 타협과 미지근한 판단으로 옳음과 그름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사람들을 재판하고 다스릴 때에 사랑의 마음이 앞서도록 하옵소서.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미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이해와 양보와 사랑의 법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화목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옵소서. 항상 따뜻한 마음씨와 겸손한 태도를 가질 수 있게 하시고, 행여 오만한 언어와 행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주께서 붙들어 주시옵소서.

특히 가난한 자의 어려움과 억눌린 자의 아픔을 돌아보는 법관이 되게 하옵소서. 강한 자, 부유한 자에게는 도움의 손이 많으나, 약한 자, 가난한 자에게는 저 외에 도울 자가 없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억울한 사람들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넓은 아량을 허락하옵소서.

아무리 하찮은 사건이라도 당사자의 자유와 권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하나하나의 재판에 최선을 다하고 신중에 신중을 더하게 하옵소서. 재판하는 자의 편리와 안일을 위하여 재판받는 사람들의 이익을 가볍게 처리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바라옵건대 항상 겸손한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법관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늘보다는 역사의 긴 날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재판관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