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이 2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청사에서 이날 새벽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해 “국민에게 다시 한번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허리 굽혀 사과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참으로 참담하고 부끄럽다”며 “사법부 구성원이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어려움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범죄사실 중 상당부분 혐의 소명되고, 사안 중대하며, 현재까지의 수사진행 경과와 피의자의 지위 및 중요 관련자들과의 관계 등에 비추어 증거인멸 우려 있으므로.”24일 새벽 양승태 전 대법원장(71·사법연수원 2기)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명재권 서울중앙지방법원 영장전담 부장판사(27기)는 구속 사유로 65자(字)짜리 단문을 내놨다.명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 요인을 △범죄혐의 소명 △사안의 중대성 △증거인멸 우려 등 세 가지로 설명했다. 구속영장 청구서에 담긴 검찰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했다.법조계에서는 이 가운데 증거인멸의 우려가 ‘결정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검찰 조사와 영장 심사 과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적극 부인한 것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얘기다. 양 전 대법원장은 후배 법관들이 검찰에서 한 이야기를 ‘거짓 진술’이라고 반박하거나 주요 물증에 대해 ‘사후조작 가능성’ 등을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영장 심사 실무에선 풀어줄 경우 도주나 증거인멸 가능성이 있는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다”며 “양 전 대법원장이 불구속 상태로 남은 수사와 재판을 받을 경우 후배들과 말을 맞추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할 가능성을 높게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양 전 대법원장이 각종 의혹에 직접 개입한 정황이 발견된 것도 ‘상당부분 혐의가 소명된다’고 판단한 근거로 작용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검찰은 ‘김앤장 법률사무소 독대 문건’ ‘판사 블랙리스트 문건’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수첩’ 등 물증을 제시하며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 개입 및 인사 보복을 단순히 보고받은 수준을 넘어 직접 지휘했다고 주장했다.법원이 내놓은 ‘사안의 중대성’이란 사유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사건에서 지난해 10월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비롯한 주요 피의자의 영장 심사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표현이다. 검찰 수사가 8개월째 이어지며 사법 불신이 심각해지는 데 대한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양승태 전 대법원장(71)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구속 수감된 전 사법부 수장이란 불명예를 안게 됐다.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엘리트 법관’으로 승승장구했던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로다.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에서 일하면서 요직으로 꼽히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실장과 차장 등을 지냈다. 행정처에서는 빼어난 업무처리 역량으로 ‘사법행정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암기력이 뛰어나고 성격이 꼼꼼하다는 이유에서 ‘양 주사’라는 별명도 붙었다.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24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미결수 신분으로 첫날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구속영장이 새벽 1시57분께 발부됐기 때문에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그에게는 6㎡ 정도의 독방이 주어졌다. 같은 구치소에 수용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독방 크기는 10.08㎡다. 그는 지난 11일 검찰 소환 때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 포토라인에서 수십여 대의 카메라를 그냥 지나쳤지만 앞으로는 한 대의 카메라를 머리 위에 줄곧 두고 생활해야 한다.양 전 대법원장의 방에는 폐쇄회로 TV(CCTV)가 설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겨울철이지만 독방 안에 딸린 화장실에서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바닥 장판에선 간헐적으로 열이 들어오는 것으로 알려졌다.양 전 대법원장은 아침에 일어나 서울구치소에서 제공하는 빵과 수프, 우유 등으로 간단히 식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전에 수인번호가 찍힌 수의를 입고 이름표를 든 채 사진을 찍는 ‘머그샷’ 촬영도 마쳤다.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4일 새벽 구속되면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한 검찰 수사는 마무리 단계로 들어갔다. 검찰은 법원의 ‘재판부 배당 조작’과 ‘정치권 재판 청탁 수용’ 의혹 등에 대한 추가 수사를 거쳐 설 연휴(2월 4~6일) 전후로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등을 한꺼번에 기소할 전망이다.기소 대상 상당히 줄어들 수도서울중앙지방검찰청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25일 양 전 대법원장을 서울구치소에서 처음으로 불러 조사할 계획이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해줬지만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다. 형사소송법상 검찰은 구속으로 신병을 확보한 이후 20일(다음달 12일) 안에는 기소해야 한다.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 청구서에 이미 담겨 있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민사소송 등 재판 개입과 법관 사찰 및 인사 보복(판사 블랙리스트) 등 40여 가지 혐의 외에도 추가 혐의를 수사해 공소장에 포함할 전망이다.검찰은 2015년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지위확인 항소심 재판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무작위로 배당해야 하는 재판을 특정 재판부로 보내기 위해 배당을 조작한 정황을 잡고 수사 중이다.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정치권의 재판 청탁 의혹에도 그가 연루됐다고 의심하고 있다. 검찰이 설 무렵에는 수사를 끝내고 재판에 넘길 것이란 관측이 많다. 만약 새로 제기된 혐의를 제대로 수사하지 못할 경우 이번 기소에선 빼놓고 추가 기소에 포함시킬 가능성도 있다.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한 기소 대상은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으로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 관계자도 “사건의 책임자(양 전 대법원장)가 구속 등으로 무거운 책임을 지면 기소 대상 범위가 줄어드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기소 예상 명단에는 양 전 대법원장과 박·고 전 대법관 외에도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이민걸·이규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등 수십 명의 전현직 법관들이 오르내렸다.“유죄라면 징역 2~5년형 전망”법조계에선 양 전 대법원장이 유죄로 판단되면 징역 2년형에서 5년형 정도가 선고될 수 있다고 내다본다. 양 전 대법원장 혐의 가운데 대다수는 재판개입에 따른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형법 제123조)다. 이 법을 위반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양 전 대법원장은 직무유기와 위계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도 받는다.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 불법 편성에 따른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혐의는 손실액이 3억5000만원이어서 최대 형량은 3년 이상 유기징역이다.여러 개의 혐의를 받는 경합범은 가장 무거운 죄 형량의 2분의 1까지 가중할 수 있기 때문에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법률상 최저형은 징역 1개월, 최고형은 징역 7년6개월이라는 게 법조계 분석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직권남용 혐의를 받는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징역 2년)과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1년6개월) 등의 형량을 감안할 때 대부분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다면 양 전 대법원장에게는 징역 2~5년가량이 선고될 것”이라고 예상했다.서울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이번 사건의 사회적 의미가 큰 데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까지 구속돼 있어 일반적인 경우보다 형량이 높아질 여지가 있지만 그동안 법원이 직권남용죄 성립 요건을 엄격하게 따져왔기 때문에 양 전 대법원장에게 마냥 불리하다고 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양 전 대법원장 재판이 임 전 차장 사건과 병합되면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가 맡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이 사실관계를 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이 나올 수도 있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의 1심 선고는 1심 최대 구속 기한(6개월)이 끝나지 않는 7월 중순 이전에 나올 것이란 전망이 많다.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