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9월 방한한 도널드 존스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과 악수하고 있다. 그는 29번째 회원(1996년 가입)인 한국이 1994년 가입당해 페소화 폭락을 경험한 멕시코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9월 방한한 도널드 존스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과 악수하고 있다. 그는 29번째 회원(1996년 가입)인 한국이 1994년 가입당해 페소화 폭락을 경험한 멕시코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95년 1월17일 새벽 5시46분 일본 효고현. 남쪽 아와지(淡路)섬 밑 지각 충돌이 ‘불의 고리’를 따라 북상해 고베시를 강타했다. 일본 관측 사상 최대였던 규모 7.3의 강진은 20초 만에 인구 150만 상업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무려 64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앙이었다.

1000억달러의 천문학적 재산피해를 남긴 ‘한신·아와지 대지진(고베 대지진)’은 수수께끼 같은 엔화의 초강세 현상을 불러왔다. ‘재해복구 자금의 자국송환’ 루머 등으로 추락한 엔·달러 환율 은 4월19일 79.75엔이라는 역사적 저점에 도달한다. 달러화의 약세를 유도하기로 한 1985년 ‘플라자 합의’ 직전(240엔)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아시아 신흥국 수출 업체들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일본 안방까지 침투하던 1995년 4월25일. 워싱턴에서 머리를 맞댄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은 미국 통화정책의 일대 전환을 알리는 합의문을 공개했다. “과도한 달러화 약세, 엔화 강세를 바로잡는 데 협력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엔화 환율은 이후 용수철처럼 반등해 1997년 140엔까지 상승하는 대반전에 들어갔다. 반대로 달러화에 환율을 사실상 고정(peg)해온 많은 신흥국 통화는 상대적 강세로 돌아섰다. 1997년 아시아 전체를 외환위기로 내몬 가장 큰 물줄기였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 그 돌이킬 수 없는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2001년 청와대를 방문한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과 김대중 대통령. 방한 당시 루빈은 씨티그룹 회장이었다. /국가기록원 제공
2001년 청와대를 방문한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과 김대중 대통령. 방한 당시 루빈은 씨티그룹 회장이었다. /국가기록원 제공
강달러 정책의 등장

“강한 달러(strong dollar)가 미국에 이득이다.”(1995년 3월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

1995년 미 재무장관에 취임한 로버트 루빈은 ‘강달러는 미국과 세계에 이득’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펼쳤다. ‘달러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과도한 경상수지 적자를 줄여야 한다’는 과거 정책을 완전히 뒤집는 주장이었다. 시장은 미국의 외환시장 개입 중단 신호로 받아들이고 달러화 자산 매입에 뛰어들었다.

1993년 집권한 빌 클린턴 정부는 당시 인플레이션(물가상승) 기대심리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 경제가 저축대부조합 부도 사태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1994년 2월. 앨런 그린스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장은 기준금리의 기습 인상(연 3%→3.25%)을 단행했다. 이후 계단식 인상은 1년 동안 계속됐다. 1995년 2월 미국 기준금리는 연 6%까지 상승했다. 금리가 오를수록 손실을 보는 채권 투자자들은 당시 상황을 ‘대학살(bond market massacre)’로 묘사했다.

미국은 국채시장을 더 망가뜨리지 않고 안정적인 성장을 뒷받침할 수단이 절실했다.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인 루빈이 주장한 강달러는 그런 효과를 발휘했다. 수입 물가는 낮아졌고 아시아 신흥국으로 흘러들어간 ‘캐리(금리 차를 이용한 단기 투자)’ 자금의 환류로 자산가격은 상승했다. 외국인의 미 국채 투자잔액은 1994년 말 6673억달러에서 3년 뒤 1조2416억달러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다우지수는 4000선에서 8000선으로 뛰어올랐다.

미국의 호황과 강달러는 신흥국에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졌다. 달러화에 묶어둔 통화가치의 동반 상승이 수출시장 경쟁력을 갉아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경상수지 적자를 해소하려 통화가치를 떨어뜨리자니 외화자금의 급속한 이탈과 수입물가 급등이 걱정스러웠다.

이런 우려는 1994년 12월 ‘멕시코 페소화 위기(급격한 평가절하)’와 함께 당면한 위협으로 돌변한다. 시장의 과민반응은 자유화 직후 페소화 가치를 50% 떨어뜨렸고 1995년 1월 외환보유액 소진과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위기로 확산했다. 세계 신흥국에 보내는 첫 번째 강력한 경고 메시지였다.

세계 2위 경상적자국이 된 한국

“경상수지 적자를 50억~60억달러로 축소할 계획입니다.”(1996년 1월 재정경제원 새해 경제운영방향 보고)

1996년 7월30일자 한국경제신문. 한국은 그해 국내총생산(GDP)의 4.5%에 달하는 사상 최대 경상 적자를 냈다.  /한경DB
1996년 7월30일자 한국경제신문. 한국은 그해 국내총생산(GDP)의 4.5%에 달하는 사상 최대 경상 적자를 냈다. /한경DB
‘국민소득 1만달러’ 위업 달성 이듬해인 1996년. 한국 경제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앓고 있었다. 대기업은 불합리한 대출 관행 탓에 고금리 빚에 허덕였다. 가파른 임금상승(1987년 이후 연평균 9.1% 상승)은 대외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최대 난제는 원화가치의 고평가였다. 1992년 증시 개방 등으로 인한 외국인 자금 유입은 원화가치를 경제 체력보다 높게 떠받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요건을 맞추려 서둘러 금융시장 무장을 해제한 결과였다. 사치품 수입은 폭증했고 수출은 부진했다. 1993년 20억달러 흑자였던 경상수지는 이듬해 45억달러 적자로 돌아선 뒤 1995년엔 당시 사상 최대인 98억달러로 불어났다. 1996년 재정경제원이 보고한 경상수지 적자 축소는 환율 조정 없이는 애초부터 허황한 계획이다.

한국의 경상수지 위기는 OECD 가입을 확정한 1996년 절정으로 치달았다. 일본 기업들이 엔화 약세를 무기로 반격에 나서면서 무려 237억달러의 적자를 냈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이자 당시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4.5%에 달하는 규모였다. 감내 가능한 수준으로 간주하는 3%를 한참 넘어섰다.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 ‘구멍’은 달러 빚으로 메워나갔다. 한국의 외채는 1993년의 439억달러에서 1996년 1047억달러로 급증했다.

정부와 한은의 신경전

“920원이 적정 수준이다. 900원을 넘더라도 손대지 말라.”(1997년 3월 강만수 재정경제원 차관)

“교역상대국 상황과 물가 등을 고려하면 890원이 마지노선이다. 그 이상은 안 된다.”(한국은행 간부)

경상수지 적자가 쌓이면 원화가치가 떨어져야 하지만 원·달러 환율은 1995년까지 계속 하락했다. 1994년 말엔 달러당 789원, 1995년엔 776원까지 내려갔다. 1996년 800원대로 올라섰지만 1997년 3월부터 7월 사이엔 890원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물가 상승을 경계한 한국은행이 시장 개입에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원화 환율은 겉으로는 수급에 따라 변하는 ‘시장평균환율제’였지만 잦은 개입 때문에 고정환율 성격이 강했다. 재정경제원은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갈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는 게 급선무라고 느꼈다.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이어진 첨예한 ‘한은 독립투쟁’ 갈등 탓에 협업은 실패로 끝난다.

달러당 890원의 ‘한은 천장’은 그해 여름에 깨졌다. 태국 정부가 7월2일 페소화를 달러에 사실상 고정한 ‘복수통화바스켓제도’를 포기한다고 발표하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금융시장이 무섭게 요동쳤다. 바트화 가치는 자유화 즉시 17% 급락했다. 태국의 1996년 경상수지 적자는 무려 GDP의 7.9%에 달했다.

‘?얌꿍 위기’로 불리는 바트화의 폭락 보름 뒤 국내에선 재계 8위 기아그룹의 채무상환 실패 소식이 터져나왔다. 수출 부진과 임금 상승, 단기채무 증가 등 한국 경제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떠안고 있던 30대 그룹은 1997년 한 해 3분의 1이 쓰러졌다. 원·달러 환율은 그해 10월에야 재정경제원이 제시한 ‘적정 수준(920원)’에 도달했다. 홍콩 증시가 하루 만에 10.4% 폭락하면서 아시아 외환위기의 ‘북상’ 비상벨이 울리던 때였다.

위기 외면한 대선정국

“한국 외환보유액 150억달러 남아”(1997년 11월5일 블룸버그통신 보도)

아시아 경제의 구조적 위기는 언론의 과장 보도와 더불어 신뢰 위기로 번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244억달러(11월 말)일 때 나온 블룸버그통신의 오보는 해외 기관투자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부동산 폭락에 따른 부실채권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일본 은행을 필두로 무작정 만기 채권을 회수해갔다.

강경식 장관이 이끄는 재정경제원은 무너진 신뢰를 되살려보려 긴급 금융개혁법안을 마련해 1997년 8월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때까지 대부분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경제위기 방지보다는 대선 승리에 눈이 먼 국회는 정쟁으로 골든타임을 허비했다.

기아차가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땐 여야 할 것 없이 ‘(오너 없는) 국민기업 살리기’ 여론에 편승해 선거전에 이용하려 했다. 주채권은행인 제일은행과 30개 종합금융회사 등은 3개월이나 9조원대 여신이 묶인 상태에서 대규모 외화채무 만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후진적인 부실채권 처리 방식은 해외 투자자의 이탈에 속도를 더했다.

실낱같은 희망들이 하나둘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한국은 태국(8월), 인도네시아(10월)에 이어 1997년 11월21일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원·엔 환율은 그때야 마침내 ‘고베 대지진 고점’(1994년 1월17일 100엔당 804원)을 회복했다. 원·달러 환율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달러당 1965원까지 상승했다. 한국의 경상수지는 1998년 사상 최대인 401억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