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美서 접시닦이하며 구상한 회사…19년 만에 시총 40兆로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시대가 올 것입니다.”

200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바이오기업 제넨텍에 정체 모를 거구의 동양 남자가 찾아왔다. 바이오 전공자도, 제약회사 출신도 아닌 그는 어눌한 영어로 대뜸 ‘바이오시밀러’라는 말을 꺼냈다. 제넨텍은 당시 유방암 치료용 바이오의약품 허셉틴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바이오시밀러의 위협을 예견한 발언은 일종의 ‘도발’이었다. 그는 “2015년이면 바이오의약품 특허가 만료되기 시작한다”며 “그 전에 우리가 의약품수탁생산(CMO)을 해줄 테니 기술을 이전해달라”고 제안했다. 가진 것은 배짱뿐인 이 동양인의 말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로부터 19년이 흐른 지난 1월9일 전 세계 투자자가 모인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의 연구개발 기술력은 제넨텍에 뒤지지 않는다.” 창업 17년 만에 시가총액 약 40조원,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 바이오시밀러 3종을 보유한 바이오기업을 일군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의 얘기다.

외환위기 실업자의 캘리포니아 드림

지난 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서 회장은 이곳을 “다시 오기 싫은 곳”이라고 했다. “여기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제넨텍이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날 무시하고 만나주지 않았거든요. ‘내가 니들 경쟁 상대가 되고 말거야’라고 다짐했죠.”

셀트리온 전신인 넥솔바이오텍을 구상한 곳도 샌프란시스코다. 대우자동차에서 서른넷에 최연소 임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서 회장은 외환위기로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1999년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그때 나이 마흔둘이었다. 취업이 안 돼 술독에 빠져 살다가 뭐라도 해보자고 대우자동차 동료 6명과 벤처기업 넥솔을 차렸다. 돈이 될 만한 사업은 모두 손댔다. 경영 컨설팅, 식품 수입업, 장례업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서 회장이 말하는 ‘사업가 1학년’ 시기다. “기업도 사람과 같습니다. 창업을 하면 신생아에서 유치원, 초·중·고를 지나 성인이 됩니다. 처음 사업을 하면 본능적으로 망하지 않으려고 ‘죽을 둥 살 둥’하게 돼 있어요. 이게 1학년 단계입니다.”

잇단 좌절 속에서 서 회장은 바이오시밀러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고가의 바이오의약품 특허가 풀리면 효능과 안전성은 동등하면서도 가격은 낮은 바이오시밀러 시장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사업이었다.

서 회장은 바이오산업 메카인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다. 창업할 때 아내가 건네준 종잣돈 5000만원은 수중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싸구려 모텔을 전전했다. 낮에는 바이오기업을 찾아 다니고 밤에는 샌프란시스코만 피어39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접시닦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세계적인 석학 토머스 메리건 스탠퍼드대 에이즈연구소장을 매일 찾아갔지만 번번이 문전박대 당했다. 보름째 되던 날 마음을 연 메리건 소장이 제넨텍 계열사 벡스젠에 추천서를 써줬다. 서 회장을 ‘사업가 2학년’으로 안내한 초대장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 바꾼 삶

넥솔바이오텍을 창업한 지 1년 뒤인 2001년 서 회장은 벡스젠과 기술제휴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벡스젠이 개발하던 에이즈 백신 기술을 이전받아 한국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듬해인 2002년 셀트리온이 탄생했다. 2003년 투자금을 끌어모아 인천 송도 간척지에 5만L 생산 규모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완공을 1년 앞둔 2004년 에이즈 백신의 임상 3상이 실패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어렵게 투자해 지은 공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처지였다. “부도를 막기 위해 은행이란 은행은 모두 찾아다녔습니다. 더 이상 대출이 불가능해 직업이 사채조달업자가 됐죠.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돈을 빌렸습니다. 각서를 하도 많이 써서 명동 사채업자들이 내게서 더 떼어갈 장기가 없다고 했다니까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결심했다.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차를 몰고 강으로 향했다. 그러다 건너편에서 돌진해오는 덤프트럭에 부딪힐 뻔하자 정신이 번쩍 났다. “보름만 더 살다 죽자고 생각했죠. 모든 일이 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감사하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마음을 고쳐먹었죠.”

죽을 각오로 일하자 풀리지 않던 일들이 하나둘 해결됐다. 2005년 3월 공장을 완공하고 3개월 뒤 BMS와 CMO 계약을 했다. 공장은 2년 뒤 아시아 최초로 FDA 승인을 받는 데 성공했다. 글로벌 수준의 생산 기술력을 입증한 것이다. 설립 5년 만인 2007년 셀트리온은 63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망할 걱정하지 않아도 돈이 벌리는 2학년에 들어선 시기다. “돈을 많이 벌어 맘껏 써보려는 단계가 2학년입니다. 오로지 돈을 버는 게 목표죠.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기업이 크지 않습니다. 돈을 벌고 나면 일할 이유가 없으니 창업자는 놀러 다니거나 회사를 팔아버리니까요. 직원들도 저 혼자 잘 먹고 잘 쓰려는 창업자 밑에서 열심히 일하려고 하지 않으니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기업가정신은 나를 버리는 것

CMO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자 회사를 팔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돈만 생각했다면 회사를 매각하고 새로운 회사를 차리는 편이 쉬웠다.

“뜻한 바가 있어 사업을 한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사업이든 장사든 돈만 되면 뭐든 다 하는 2학년 단계를 넘어 어느 정도 돈을 벌면 더 이상 벌어서 무엇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돈 대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게 되는 거죠.”

서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안정적인 CMO 사업으로 돈을 버는 대신 우리만의 바이오시밀러를 개발해보자고 생각했다. 2009년 BMS의 CMO 사업을 중단하고 바이오시밀러로 방향을 바꿨다. 주변에선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다. 살아있는 세포로 만드는 바이오의약품은 고난도 기술이 필요해 복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서 회장은 밀어붙였다. 국내에서 투자받기 어려워 2010년 5월 싱가포르 테마섹에서 2080억원을 투자받아 2공장을 지었다. 제품을 개발하기도 전에 생산설비에 선제 투자했다. 셀트리온은 2012년 7월24일 세계 최초의 항체 바이오시밀러 ‘램시마’를 내놨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6년 4월6일 램시마는 FDA 허가 관문을 통과했다.

서 회장은 “2학년 단계를 넘어선 기업가들이 많아져야 그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했다. “기업이 성공해 3학년이 되면 애국자가 됩니다. 남들도 애국자라고 치켜세워주고 나라를 위해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국가, 사회와 갈등을 겪으면 이 나라가 내게 뭘 해줬나 원망하다가 공존과 상생을 생각하는 4학년이 됩니다. 5학년이 되면 다음 세대에 어떻게 기억될지 생각하게 돼요. 이렇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게 기업가정신입니다.”

그가 말하는 기업가정신은 뭘까. 서 회장은 ‘희생’이라고 답했다. “기업가는 회사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돼야지 군림해선 안 됩니다. 그래야 구성원들이 회장 개인의 회사가 아니라 우리 회사라는 생각을 가지니까요. 모든 사람에게 보람과 신뢰를 주는 것, 이게 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서 회장은

△1957년 충북 청주 출생
△1977년 인천 제물포고 졸업
△1983년 건국대 산업공학과 졸업
△1983년 삼성전기 입사
△1986년 한국생산성본부 전문위원
△1990년 건국대 대학원 경영학 석사
△1991년 대우자동차 기획재무부문 고문(전무대우)
△1992년 한국품질경영연구원장
△2000년 넥솔·넥솔바이오텍 설립
△2002년 셀트리온 설립
△2009년 셀트리온제약 설립


샌프란시스코=전예진 기자/사진=강은구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