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40대 CEO 나올 때 됐다"
삼성 작년 '60세 CEO 퇴진' 후
대기업들 비슷한 잣대 잇단 적용
LG 134명 최대 상무 승진 속
올해 회사 나간 임원 100명 넘어
MS·구글·우버 CEO 모두 40대
세대교체는 글로벌 생존 전략
최근 연말 정기 임원인사에서 퇴임 통보를 받은 LG그룹 계열사 임원이 들려준 얘기다. LG그룹은 당시 계열사 임원인사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신규 임원(상무) 승진자 수가 134명으로 2004년 GS와 계열분리 이후 최대 규모”라고 발표했다. 불확실한 경영환경에 차기 최고경영자(CEO)군을 넓히기 위해 핵심 인재를 조기 발탁했다는 게 LG그룹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세대교체 인사로 인해 퇴직 임원 수가 크게 늘어난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 인사로 LG그룹 계열사에서 그만둔 임원은 1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계열분리 이후 최대 규모다. 삼성 인사 벤치마킹 나선 대기업
삼성, 현대자동차, SK, LG그룹 등 주요 그룹의 연말 정기 임원인사가 마무리된 뒤 재계 임원들이 술렁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를 기민하게 따라잡기 위해 고위 임원들을 대폭 ‘세대교체’하는 흐름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이 지난해 60대 CEO들을 대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이후 재계에서 삼성의 인사 전략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임원 직급별 정년이 되살아났다는 분석도 나온다.
13일 재계에 따르면 LG그룹 일부 계열사들은 올해 임원 인사에서 58세 이상 부사장과 56세 이상 전무 가운데 상당 수를 퇴임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실적이 월등히 뛰어나거나 후임자를 찾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이가 인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계열사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고(故) 구본무 회장이 없앴던 직급별 정년이 부활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라고 말했다.
SK그룹은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60)과 박만훈 SK케미칼 사장 등 60세 이상 CEO들이 모두 현직에서 물러났다. 현대차그룹도 김용환(62) 우유철(61) 양웅철(64) 권문식(64) 등 4명의 부회장이 자리를 옮기거나 퇴임했다. 전문경영인 출신 5명의 부회장단 중 노무 업무를 담당하는 윤여철 부회장(66)만 이번 인사에서 제외됐다. 여승동(63·현대기아차) 임영득(63·현대모비스), 조원장(64·현대다이모스), 강학서(63·현대제철), 김승탁(61·현대로템) 등 60대 이상 사장도 5명 물러났다. 지난해 삼성그룹이 ‘60세 이상 CEO’를 모두 퇴임시킨 것과 궤를 같이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올해 삼성그룹은 계열사 임원 중 60세를 넘긴 임원들은 퇴임시킨다는 원칙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직급 정년 때문에 부사장 1년차, 전무 1년차에 이례적으로 물러난 임원도 많다”며 “물러난 임원들로부터 ‘나이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그룹 계열사에선 ‘고참 부장’들도 초긴장 상태다. ‘승진 정년’을 적용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서다. 예외가 없는 한 만 52세를 넘어서면 임원(상무)으로 진급할 수 없다는 게 골자다. 전무는 55세, 부사장은 56세다. 이로 인해 올해 임원 인사 직후 “나이를 다시 따져보는 직원들이 부쩍 늘었다”는 전언이다.
글로벌 ‘테크기업’ CEO는 40대
국내 간판 기업들이 ‘직급 정년’을 다시 엄격하게 적용하게 된 배경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우버 등 실리콘밸리의 혁신 기업들과 경쟁하는 기업에서 부사장급 이상 고위 임원들을 세대교체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글로벌 테크기업엔 40대 CEO들이 수두룩하다. 세계 최고의 혁신기업으로 꼽히는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CEO는 올해 46세다. 우버의 다라 코스로샤히 CEO도 49세다.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도 47세에 CEO가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한국에서도 40세 CEO가 나와야 한다”고 종종 얘기하는 이유다. 삼성전자가 올해 임원인사에서 노태문 무선사업부 개발실장(사장)을 비롯한 ‘4말5초(40대 후반~50대 초반)’ 임원들을 부사장급 이상 고위 임원으로 승진시킨 배경이다. 현대차, SK, LG그룹에서도 글로벌 대기업에 근무한 경험이 있거나 해외 유력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유학파’들이 고위 임원으로 승진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4대 그룹 계열사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삼성이 촉발한 임원 승진 인사 트렌드가 재계 전반으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대기업 임원들 사이에서 “나이가 많은 임원들은 가시방석에 앉았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기업 관계자는 “조직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