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친구들이 교복처럼 입던 노스페이스 패딩도 못 샀지만, 지금은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잖아요.”

이정은 "LPGA 가야 하나 고민 많았죠…이직 전 속앓이가 이런 느낌인가요"
얼갈이 해장국을 10분 만에 뚝딱 해치운 이정은(22·대방건설·사진)이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LF포인트 왕중왕전(총상금 1억7000만원) 개막을 하루 앞둔 16일 전남 장흥 JNJ골프리조트에서 만난 이정은은 “좋아하는 옷을 사고 싶을 때 살 수 있고 그때마다 뿌듯하다”며 “지금까지 이룬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했다고 느낀다. ‘나’만 생각한다면 솔직히 한국에 있는 게 편하다”고 했다. 이어 “하지만 내가 아니라 ‘이정은6’을 생각했을 땐 미국에 가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 느낌이다”고 말끝을 흐렸다.

“현재에 만족, 미국 가야 하는 이유 못 느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명예의 전당’ ‘그랜드슬램’ 등 여자 프로골퍼라면 한 번쯤 꿈꿨을 목표. 그는 이달 초 열린 LPGA 투어 퀄리파잉 시리즈를 수석으로 통과해 2019시즌 출전권을 획득, 그 목표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덤덤하다. 이정은은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된 아버지를 돕고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골프를 시작했다. 이를 애써 숨기지 않는다. 이정은은 전년도 KLPGA 투어 전관왕에 오른데 이어 올해도 상금왕 등 2관왕을 차지해 지난 2년간 상금으로만 21억여원을 벌었다.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가끔 쇼핑도 하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지금이 그에겐 가장 행복한 시기다.

“LPGA 퀄리파잉 시리즈는 주변에서 미국에 진출할 것을 대비해 확보해 놔야 한다고 해서 출전했어요. 솔직히 이제 겨우 20대 초반이잖아요. 엄마한테 필요할 때 용돈을 받아 쓰고 친구들과 놀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한 상황에서 미국에 가는 게 맞는 건지 고민했죠.”

미국 진출 마음 굳혀, 서두르진 않을 것

그럼에도 이정은은 LPGA 투어 진출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올해 미국에서 뛰고 퀄리파잉 시리즈를 경험하면서 LPGA 투어가 얼마나 큰 무대인지를 체감했고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KLPGA 투어의 총상금 규모는 210억여원. LPGA 투어는 세 배가 넘는 756억여원(약 6700만달러)에 달한다.

“퀄리파잉 시리즈에서 3번 우드로 내 드라이버보다 더 멀리 치는 선수가 있었어요. 드라이버를 치면 한 50m는 더 나가는 게 신기하면서도 확실히 정확성은 떨어지는 게 느껴졌죠. 샷이나 스윙은 우리나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정은은 한국에서처럼 미국에서도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진출 첫해에는 차근차근 적응하는 것에 집중할 계획이다. 다행히 미국 대회를 경험하면서 음식이나 잠자리 등이 모두 잘 맞았다.

“직장인과 비교하자면 마치 이직 고민을 한 것 같아요. 더 큰 규모의 LPGA 투어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지만 원래 회사에선 적응이 끝났으니까요. 지금은 생각이 정리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매니지먼트사와 이야기를 시작한 상황인 만큼 준비가 완벽히 되면 그때 (팬들에게) 제대로 말씀드리고 싶어요. 첫해 목표요? 우승은 아니에요. 부담감을 갖는 순간 골프가 안 되더라고요. 톱10에 들면서 차근차근 해 나갈게요.”

장흥(전남)=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