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현대상선 정상화 '출항'…연내 8000억 자본수혈
마켓인사이트 10월12일 오후 4시15분

정부가 현대상선에 연내 8000억원의 자본을 수혈한다. 거듭된 적자로 자본잠식에 빠진 현대상선은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경영 정상화에 나선다.

[마켓인사이트] 현대상선 정상화 '출항'…연내 8000억 자본수혈
1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정부와 최대주주인 산업은행, 해운산업 재건을 위해 지난 7월 출범한 한국해양진흥공사는 이 같은 내용의 ‘현대상선 정상화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

현대상선은 연내 80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영구채)을 발행해 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사가 이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자본을 확충한다. 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사가 4000억원씩 출자금을 분담한다.

자본 확충 이후 해양진흥공사는 보증 지원을 통해 현대상선이 민간 선박금융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다. 출자금과 선박금융 등을 합치면 약 5조원의 자금이 현대상선으로 흘러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대상선은 이 돈을 △초대형 컨테이너선 20척 건조 △컨테이너 구입 △부산 신항 4부두 지분 매입 등에 쓸 예정이다.

현대상선은 SM상선이 보유하고 있는 옛 한진해운 미주노선 인수도 추진하고 있다. 국적 원양선사를 일원화해 미주 노선에서 국내 선사들끼리 출혈경쟁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국적 원양선사는 현대상선으로 통합해 중소 해운사 연합과 함께 두 축으로 해운산업을 재편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8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하면서 현대상선은 급한 불을 끄게 됐다. 한국해양진흥공사의 보증 아래 대규모 민간 선박금융을 끌어올 수 있는 길도 열린다. 현대상선이 고비용 구조를 해소하고 선복량(적재량)을 늘려 경영을 정상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영구채 발행 통한 자본 확충

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사는 자본잠식에 빠진 현대상선의 자본 확충 방식으로 유상증자 대신 신종자본증권(영구채) 발행을 택했다. 영구채 발행이 증자보다 회계상 자본잠식률을 낮추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영구채는 만기가 정해져 있지만 발행회사 결정에 따라 만기를 늘릴 수 있어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받는 채권이다.

현대상선은 13분기 연속 적자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 6월 말 자본잠식률은 66%까지 치솟았다. 올해 안에 자본잠식률을 50% 아래로 낮추지 못하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돼 상장폐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번 자본 확충으로 자본잠식률을 10%대로 낮출 수 있을 전망이다.

해양진흥공사는 선박보증과 추가 자금 지원 등을 통해 현대상선 정상화 작업을 지속적으로 측면 지원하기로 했다. 현대상선은 향후 5년간 △초대형 컨테이너선 건조 △부산신항 4부두 지분 매입 △컨테이너 박스 150만 개 구매 등을 위해 5조원 이상이 필요하다. 정부는 이번에 들어오는 출자금과 선박금융 등을 합치면 5조원가량이 현대상선에 유입돼 필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부산신항 4부두 매입할 것”

현대상선은 이번에 들어오는 자본금으로 국내 사모펀드(PEF) 운용사 IMM인베스트먼트가 갖고 있는 부산신항 4부두 지분 40%를 약 1600억~1700억원에 매입할 계획이다. 현대상선은 재무구조가 악화되자 부산신항만 지분을 2015년과 2016년 IMM인베스트먼트와 다국적 터미널 운영사 PSA에 넘겼다. 이 당시 6년간 매년 3%씩 하역료를 올려주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고, 이는 회사 재무구조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현대상선이 항만 운영권을 되찾으면 고비용의 하역료를 정상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수천억원의 비용을 아낄 수 있다”고 말했다.

초대형 친환경 컨테이너선 20척 건조는 선복량을 늘려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다. 현대상선은 지난달 2만3000TEU급 컨테이너선 12척을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에, 1만4000TEU급 8척을 현대중공업에 발주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총 3조1531억원 규모다. 현대상선의 선복량은 41만TEU(1TEU는 6m짜리 컨테이너 1개) 수준으로 세계 1위 해운사인 머스크(412만TEU)의 10% 수준에 불과하다. 더욱이 글로벌 해운사들은 인수합병(M&A)으로 덩치를 키우는 동시에 선복량도 대폭 늘리고 있다. 대형 선박 확보를 통해 운송비용을 낮추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게 현대상선 판단이다.

◆해양진흥공사, 해운산업 재편 ‘주도권’

국내 해운업 재건의 중책을 맡은 해양진흥공사는 이번 현대상선 지원을 계기로 본격적인 해운산업 구조조정을 맡는다. 2021년부터 산업은행이 갖고 있는 현대상선 관리 권한을 넘겨 받아 해운산업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다. 그동안 국내 기간산업의 구조조정 작업을 지휘했던 산업은행이 2021년을 기점으로 현대상선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은 해양진흥공사 주도로 해운산업 재편을 해 달라는 정부 의중이 반영돼 있다는 게 중론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현대상선을 중심으로 한 국적 원양선사와 중소 해운사 연합을 양대 축으로 삼아 해운산업을 재편하는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상선이 SM상선으로부터 옛 한진해운 미주 노선을 사들이려는 움직임도 해운업 재편 과정의 일환이라는 분석이다. SM상선은 지난해 2월 한진해운이 파산하자 이 회사의 미주·아시아노선을 약 380억원에 인수해 컨테이너선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누적된 적자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IB업계 관계자는 “SM상선이 독자 생존과 회사 매각을 놓고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결국 매각 가격이 변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지훈/황정환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