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제약사 노보노디스크는 2000년대 중반 당뇨병 치료약 ‘빅토자’의 임상시험 도중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이 약을 특정 용량 이상 투여한 환자들에게서 체중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 회사는 2007년 체중감량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7년 만인 2014년 1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빅토자와 성분이 같고 용량만 다른 ‘삭센다’를 비만 치료제로 허가했다. 최근 국내에서 품귀현상을 빚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삭센다가 개발된 배경이다. 당뇨 치료제로 개발한 이 약은 포만감을 줘 식욕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어 고도비만 치료에 활용되고 있다.
당뇨병 약이 비만 치료제로, 진통제가 뇌졸중 치료제로…오래된 藥의 재발견
신약의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또 다른 약 개발로 이어진 사례다. 삭센다뿐 아니다. 화이자의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 MSD의 탈모 치료제 ‘프로페시아’는 모두 다른 치료약을 개발하다 우연히 개발됐다. 오래된 약의 새 효능을 찾아 또 다른 신약을 개발하는 ‘신약 재창출(Drug repositioning)’은 새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전문가들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을 의약품 개발에 활용하면서 신약 재창출 사례는 더욱 늘 것으로 전망했다.

실수로 태어난 비아그라

일양약품의 ‘슈펙트’는 백혈병 치료약이다. 일양약품은 이 약이 파킨슨병,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에 효과가 있는지 추가 임상시험을 계획하고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진이 파킨슨병에 걸린 실험용 쥐에게 슈펙트를 투여했더니 질환의 진행이 억제됐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바이오회사 젬백스앤카엘도 췌장암 치료제 ‘리아백스’가 알츠하이머, 전립선 비대증 등에 효과가 있는지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의약품은 인체의 다양한 부위에 작용하고 작용 기전이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질환을 겨냥하고 개발한 약이 다른 질환 치료에 활용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했다.

비아그라의 성공은 제약사들이 이 같은 형태의 신약 개발 연구를 늘리는 계기가 됐다. 화이자는 고혈압·협심증 치료제를 개발하던 중 임상연구에 참여한 남성 환자들에게서 성기능 문제가 해결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혈관이 확장돼 혈류를 개선하는 원리다. 1998년 발기부전 치료제로 미국 FDA 승인을 받은 이 약은 지난해까지 세계 6000만 명이 처방받았다. 비아그라는 또 다른 전환점에 서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의료진이 황반변성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미 개발된 신약서 새 약효 발견

프로페시아도 ‘부작용’ 덕에 신약으로 탈바꿈한 사례다. MSD는 전립선 비대증 치료를 위해 프로스카를 복용한 환자들에게서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는 부작용이 생겼다는 점에 주목했다. 용량을 줄여 출시한 프로페시아는 세계 1위 탈모 치료제가 됐다. 황반변성 환자가 줄지어 처방받는 로슈의 유방암 치료제 ‘아바스틴’, 혈전 용해제로 널리 쓰이는 바이엘의 진통제 ‘아스피린’도 이런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 같은 신약 재창출은 새로운 산업이 됐다. 의약품 임상 절차가 까다로워진 데다 새 물질 개발이 한계에 다다르면서다. 신약을 시판하려면 10년 넘는 기간 동안 2조원 이상의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후보물질 발굴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연구개발비는 점차 증가했다. 세계제약협회연맹(IFPMA)에 따르면 1975년 신약 1개를 개발하는 데 들어간 연구개발(R&D) 비용은 1억3800만달러였다. 지금은 이보다 10배 이상 필요하다.

신약 재창출은 물질 발굴 기간과 비용을 크게 줄였다. 노보노디스크가 삭센다 성분인 리라글루티드를 합성해 당뇨약 빅토자로 허가받기까지 12년이 걸렸다. 반면 빅토자의 비만 치료 효과를 확인한 뒤 삭센다 개발까지 소요된 시간은 7년이다. 이미 개발된 물질을 대상으로 치료 가능한 질환군(적응증)을 늘렸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약을 개발할 수 있었다. 눈꺼풀 떨림증, 사시 치료를 위해 개발한 보툴리눔톡신을 주름개선제로 바꾼 것도 같은 원리다.

개발 물질 한계 지적도

신약 재창출에도 한계는 있다. 개발한 약의 특허권을 확보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렵다. 이미 개발된 물질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적용 범위도 넓지 않다. 최근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AI 활용이 늘고 있다. 다양한 의약품 성분과 유전체 등을 분석해 맞춤 의약품을 찾는 것이다. 정부도 힘을 보태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내년에 100억원을 들여 AI 신약개발 프로그램과 스마트 임상시험 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다.

조원영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AI를 활용해 기존 화합물 정보를 수집·학습하고 최적의 화합물 조합을 예측하면 후보물질 발굴 기간을 5년에서 1년 내외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제약사들이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