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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카고 옵션거래소가 거래를 시작한 1973년, 경제학자 피셔 블랙과 마이런 숄스가 논문을 발표했다. 시장에 공개된 데이터로 여러 옵션의 예상 가격을 계산할 수 있는 모델을 내놓아 화제가 됐다. 발표 초기 이 공식에 따른 예상 수치와 옵션거래소의 실제 시장 가격은 30~40%가량 차이가 났다. 해를 거듭할수록 상황은 달라졌다. 불과 몇 년 후 예측 가격은 시장 가격에 2% 차이로 근접했다. 두 경제학자는 199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블랙-숄스 모델’은 성공한 이론이었을까. 이후 경제사회학자 도널드 매켄지와 유발 밀로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거래소와 파생상품 거래자들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만났다. 그로부터 거래자들이 점점 이 모델에서 산출된 예상 가격을 기준 삼아 호가를 정했기 때문에 블랙-숄스 모델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해졌음을 알게 됐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는 《도넛 경제학》을 통해 자기중심적 인류 ‘호모 이코노미쿠스’, 즉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던진다. 저자는 “금융경제학은 이론적으로 정립해온 시장을 현실에서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며 “그 이론이 결함이 있다고 판명 나는 날에는 지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경고한다.

[책마을] 지속가능한 경제모델은 '뚱뚱한 도넛' 만드는 것
옥스퍼드대 환경변화연구소 초빙 연구원이자 케임브리지대 지속가능성리더십연구소 연구원인 저자는 예기치 못한 경제 위기와 심해지는 빈부 격차, 가차 없는 환경 파괴 등 세계 경제가 마주한 오늘의 위기를 상기시킨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책을 통해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 경제학자답게 생각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기반이 되는 것이 인간의 생존권, 복지, 평등, 정의, 생태, 지구환경까지 아우른 ‘도넛 경제 모델’이다. 도넛의 안쪽 고리는 사회적 기초를 의미한다. 그 안의 빈 부분으로 떨어지면 기아와 문맹 같은 심각한 인간성 박탈 상태에 이를 수 있다. 바깥쪽 고리는 생태적인 한계를 보여준다. 도넛의 큰 원 밖으로 나가면 기후 변화와 생물의 다양성 손실 등 치명적인 환경 위기를 맞는다.

두 고리 사이 도넛의 공간이 ‘지구가 베푸는 한계 안에서 만인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영역’이다. 작은 원의 테두리인 사회적 기초란 모든 이가 반드시 누려야 할 최소 수준의 안녕이고 큰 원은 지구의 생태적 한계로, 누구도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라는 설명이다. 인간과 세상을 함께 지키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도넛’으로 그려 보인 것이다. 안쪽은 주거와 교육, 에너지와 식량, 보건과 네트워크 등의 영역으로 분류하고 바깥쪽은 대기 오염과 기후 변화, 생물의 다양성 손실과 해양 산성화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2011년 저자가 처음 발표한 도넛 모델은 가치지향적 경제를 위한 발상의 전환으로 ‘유엔의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2016~2030) 협상의 틀이 되기도 했다.

저자는 도넛의 경계를 단단하게 해줄 경제적 자아도 다시 설정한다. 우선 인간은 자기 이익 때문에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 호혜성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 악착같이 계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대충 근사치를 구하면서 만족하고, 서로 의존해 살아가며 자연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생명의 망 속에 포함된 존재라는 것 등이다.

다양한 경제학자의 이론이 등장하는 데다 제시하는 사례별 맥락도 알아야 해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다양한 비유로 이해도 돕는다. 시장 참여자들이 사건 진행 방향에 영향을 주고, 그것 때문에 다시 참여자들이 영향을 받는 ‘시장의 회귀성’을 설명하면서 ‘영문도 모르면서 따라 춰야만 하는 춤’으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예로 든다거나 “경제를 기계가 아닌 유기체라는 개념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경제학자들은 엔지니어에서 정원사로 업종을 바꿔야 한다”고 서술한 부분 등이다.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경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돌보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4장 ‘시스템의 지혜를 배워라’에서는 복잡계 경제학자 에릭 바인하커의 말을 빌려 “경제의 움직임을 예측하거나 통제하려 들지 말라”는 대목이 나온다. 일자리, 부동산 등과 관련한 정책 구사의 어려움을 겪는 오늘의 한국에도 와닿는 부분이다. 경제와 사회가 진화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스템의 흐름을 읽어 불확실성을 줄여가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학을 “모든 공공정책의 모국어일 뿐 아니라 공공 생활의 언어, 사회를 형성하는 세계관과 사고방식”이라고 정의한다. 21세기에 우리가 공유해야 할 경제적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