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격식 있는 곳에서 즐기는 술이란 인식이 많다. 잘 차려입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정찬을 즐길 때, 혹은 화려한 파티나 야외 피크닉 장소에서 와인을 마셔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반바지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집에서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와인을 구입하는 사람도 많다. 와인 애호가로선 반갑고 신기한 일이다. 와인 칼럼 첫회를 시작하면서 우선 국내 와인시장의 발전 과정을 짚어보려 한다.

넘버나인 크로이처
넘버나인 크로이처
정부가 민간에 주류수입 면허를 허용한 것이 1987년 말이다. 이후 30년 동안 전년 대비 수입액이 하락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단 두 번뿐이다. 연간 수입금액은 1988년 380만달러에서 2017년 2억1000만달러로 약 55배 증가했다. 2000년대 초반 ‘막걸리 열풍’, 2010년대 ‘수입맥주 열풍’ 등이 있었지만 와인은 다른 주종과 달리 큰 부침 없이 꾸준히 성장했다.

소비자층도 넓어졌다. 2000년대 초반까진 40대 중반 이상의 중년 남성 위주였다. 2010년 이후 최근 7~8년간은 20~30대로 저변이 넓어졌다. 여성이 와인을 많이 마시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소비층 다양화는 2004년 칠레와 맺은 자유무역협정(FTA)이 계기였다. 품질 좋고 값싼 칠레 와인 덕분에 와인시장은 빠르게 커졌다. 이후 이탈리아 미국 스페인 호주 독일 뉴질랜드로 확산되더니 지금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포르투갈, 슬로베니아, 몰도바 등 동유럽으로 수입국이 다변화됐다. 와인 종류도 2007년까지 레드 와인 비중이 78%를 차지했지만 이제는 70% 안팎으로 떨어졌다. 이에 비해 스파클링 와인은 2010년 5%대에서 현재 15% 안팎으로 껑충 뛰었다. 화이트 와인 비중은 15% 수준을 유지하지만, 품종은 다양해졌다.

유통채널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2000년 이전만 해도 와인은 고급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주로 판매됐다. 2000년 최초의 와인 전문점 ‘와인나라’가 생겼고, 이후 백화점에도 주류 코너에 와인이 들어왔다. 서울 청담동 일대에선 와인 바 문화가 도입됐다. 2005년 이마트 양재점 주류 코너에 와인 매장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대형마트에도 와인 매장이 들어섰다.

1인 가구 증가로 인한 ‘혼술’ ‘혼밥’이 일반화한 뒤 요즘은 편의점에까지 와인이 진출했다. 지난해 편의점 와인 매출 증가율은 전년 대비 10.9%에 달했다. 올 상반기에는 이 수치가 28%로 뛰었다. ‘편의점 와인 시대’가 열린 것이다. 편의점은 매장 규모가 작아 와인 진열대를 많이 두기 어렵다. 편의점당 많아야 3~4종이다. 이 때문에 소수의 특정 와인을 선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GS25가 수입해 판매 중인 ‘넘버투 로만체’와 ‘넘버나인 크로이처’가 대표적이다. 넘버투와 넘버나인은 명화, 명작, 명곡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와인이다. 라벨에 있는 QR코드를 통해 라벨에 담긴 명화, 명작, 명곡의 의미를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와인은 칠레산이다. 하지만 메이커는 다르다. 넘버투 로만체는 칠레 최대 규모 ‘콘차 이 토로’가 생산한 와인이다. 넘버나인 크로이처는 칠레에서 프리미엄 와인에 특화한 ‘에라주리즈’가 만들었다. 콘차 이 토로는 규모만 큰 회사가 아니다. 19회 연속 올해의 와이너리 수상으로 세계적인 유명 주류 매거진 ‘와인 앤드 스피리츠’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정도로 좋은 와인을 생산한다. 0.6초당 한 병씩 판매된다는 ‘디아블로’ 시리즈와 프리미엄 와인 ‘돈멜초로’ 유명하다. 에라주리즈는 ‘비네도 채드윅’이란 와인으로 칠레 와인 최초 ‘제임스 서클링’ 100점을 받기도 했다. 이 회사가 생산한 또 다른 와인 ‘세냐’, ‘돈 막시미아노’ 등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제품이다.

편의점 와인이라고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와인을 개발하고 선정하려는 노력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편의점 와인 코너를 유심히 살펴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조사가 만든 엄선된 와인이 당신의 눈앞에 있을 것이다. 편의점에서 와인을 구입해 합리적인 사치를 즐겨 보는 것은 어떤가.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따로 없을 것 같다.

이지혜 < 와인나라 아카데미 교육 M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