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당원 집중지원으로 대세론 쐐기…'강한 리더십 필요' 표심 분출
초선 박주민 돌풍…득표율 1위로 최고위원 올라
이변은 없었다…민주 당심은 "20년 집권" 이해찬에
대세론은 실재했고 이변은 없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해찬 전 국무총리에 2년간 당의 운명을 맡겼다.

이 대표는 25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새로운 당대표로 선출됐다.

수락 연설에 나선 이 대표의 모습은 2년 전 같은 장소에서 추미애 의원이 당의 새 지휘봉을 잡았던 장면과 겹쳤다.

2016년 8·27 전당대회 당시 이종걸·김상곤 후보도 '추미애 대세론'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추 대표는 친문(친문재인) 몰표를 받으며 과반(54.03%)의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이 대표 역시 42.88%의 총 득표율로 여유 있게 승리를 따냈다.

2위 송영길 후보(30.73%)는 선전했으나 10%포인트 넘는 큰 격차로 고배를 마셔야 했다.

무엇보다 1만5천여명의 대의원(45%)과 71만여명의 권리당원(40%)이 그야말로 표를 몰아주면서 '이해찬 대세론'을 입증했다는 평가다.

특히 당락을 좌우할 친문 표심이 이 대표를 비롯해 송영길·김진표 후보로 각각 나뉘었음에도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아울러 대의원보다 '관망표'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던 권리당원에서도 42.79%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이 승기를 굳힐 수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권리당원 표 반영 비중은 대의원보다 5%포인트 낮지만 약 70만명에 달하는 절대적 규모 차이 때문에 이들의 표심이 사실상 이번 전당대회의 승부를 가를 열쇠로 여겨졌다.
이변은 없었다…민주 당심은 "20년 집권" 이해찬에
이 대표는 상대적으로 고정표가 많은 대의원(40.57%)에서도 40% 넘는 득표율을 올렸고, 국민여론조사에서 44.03%, 일반당원 여론조사에서는 38.2%를 찍으며 고르게 표를 가져왔다.

선거 막판에 이르면서 박빙의 승부가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이 커진 가운데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당의 안정적 운영과 아울러 '집권 20년 플랜'이라는 선명한 노선을 효과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나아가 당원들은 정부·여당이 본격적인 개혁 드라이브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1년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21대 총선의 승리라는 막중한 과제도 떠안아야 하는 여당 대표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경륜과 강한 리더십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경선 기간 내내 "당정청 회의만 100번가량을 해봤다.

엄격한 김대중 대통령 모시고 정책위의장만 3번을 했다"며 당정소통의 적임자라고 강조해왔다.

이 후보가 경선 막바지 캐치프레이즈로 들고나온 '민주당의 마지막 보루'라는 문구도 그러한 당심을 잘 파고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변은 없었다…민주 당심은 "20년 집권" 이해찬에
경선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후보 간 치열하게 치고받는 혼탁한 상황으로 흐른 것도 '이해찬 대세론'의 동력을 다시금 강화했다는 시각이 있다.

'철통같은 단결'을 누누이 외친 그에게 당내 분열 등 선거 후폭풍을 우려한 당심이 최종 결집했다는 것이다.

집권 이후 추 대표 체제에서 여당이 청와대에 끌려만 다녔다는 지적도 거셌던 만큼 '강한 여당 대표'를 내세워 당 존재감을 키워야 한다는 당내 목소리도 이번 전당대회 표심에서 적잖게 표출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열린우리당 시절 극심한 당청 갈등에 지방선거와 대선, 총선에서 줄줄이 참패했던 '학습 효과'가 당을 압도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 대표는 당장은 당청 화합에 역점을 둘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편, 8명의 후보가 치열하게 경합한 최고위원 선거에선 초선의 박주민 의원이 총 득표율 21.28%로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김해영 신임 최고위원과 함께 '초선 돌풍'을 주도했다.
이변은 없었다…민주 당심은 "20년 집권" 이해찬에
'힘없는 자의 힘이 되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박 최고위원은 잇따른 경선 합동연설회에서 어느 후보보다 호소력 있는 메시지로 표몰이에 성공, 일찌감치 최고위원 당선이 유력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었다.

세월호 유가족 법률대리인을 맡는 등 여의도에 입성하기까지 인권변호사로 활약해 다른 후보보다 인지도 면에서도 월등히 앞선 것도 '박주민 반란'의 큰 힘이 됐다는 지적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