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7일간 긴장과 우려, 기대와 환호가 교차한 가운데 숨 가쁘게 진행돼왔던 사상 초유의 미·북 정상회담 개최 준비가 24일(미국 동부시간 기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소 발표로 종결됐다.

미국 NBC뉴스와 CNN,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6·12 미·북 정상회담 취소를 논의하기 시작해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1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정상회담 취소와 관련한 미국 정부의 논의는 23일 밤 본격적으로 시작돼 24일 오전 마무리됐다.
"北이 우리를 모욕"… 트럼프, '판' 엎는데 12시간도 안걸렸다
미·북 정상회담을 둘러싼 백악관 안팎의 회의론은 21~22일 문재인 대통령의 워싱턴DC 방문 때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 조건이 맞지 않으면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을 수 있다”고 언급한 뒤 확산됐다. 회의론을 잠재우지 못하고 문 대통령이 워싱턴을 떠난 지 하루 뒤인 23일 오후 7시에 나온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담화는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최 부상은 ‘리비아 모델’을 언급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향해 원색적 비난을 쏟아내며 미 정부를 위협했다.

미 정부의 회담 취소 논의에는 트럼프 대통령 외에 펜스 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소수의 고위관리만 참여했다. 최 부상의 ‘펜스는 얼뜨기’ 담화가 나온뒤 백악관에서는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놓고 본격적인 마라톤 회의가 벌어졌다. 결국 회담 취소 결정이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가 끝난 지 3시간 만에 나왔다.

백악관 관계자는 “최 부상의 이 언급이 ‘인내의 한계’였다”고 말했다. 비핵화 담판을 앞둔 시점에서 ‘핵 보유국’을 자청한 것도 미국을 자극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 아침 일찍 김정은에게 회담 취소 결정을 알리는 공개서한 초안을 작성했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취소 소식이 유출될 것을 우려해 한국과 일본을 포함해 주요 동맹국이 상황을 감지하기 전에 공개서한을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도 논의에 관여하지 않았고, 취소가 결정된 뒤에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화로 통지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서한은 이날 오전 9시43분 북한 측에 전달됐고, 9시50분께 발표됐다.

결정이 갑작스럽게 이뤄지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의회 지도자들과 주요 동맹국에 사전통고할 수 없었다고 NBC는 전했다. 또 다수의 미국 관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이 선수칠 것을 우려하면서 북한보다 먼저 회담을 취소하기를 원했다고 전했다.

미국 언론은 회담 취소 결정을 이끈 것은 볼턴 보좌관으로, 그가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보도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두 차례 평양 방문 후 기대가 컸던 미·북 정상회담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8일 김정은이 중국을 두 번째 방문하면서다. 김정은은 미국 요구와 달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면담에서 비핵화 단계별로 보상을 받는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원칙을 재확인하며 날을 세웠다.

억류자 송환 등에 가려 드러나지 않던 양국 갈등은 13일 볼턴 보좌관이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을 공식화하면서 표면화됐다. 북한은 이틀 뒤 볼턴 보좌관의 발언을 문제 삼아 처음으로 ‘정상회담 보이콧’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틀 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이 이 같은 북한 태도 돌변의 배경이라고 지목했다. 북한은 그 주말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싱가포르 실무 회담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연락도 차단했다. 백악관 고위관계자는 “북한이 우리를 바람맞혔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에 트럼프 대통령이 호응하면서 다음달 12일 예정대로 미·북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25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북한)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전 트위터를 통해서도 “북한으로부터 따뜻하고 생산적인 담화를 들은 것은 매우 좋은 소식”이라고 했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