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경제가 문제? 진짜 문제는 정치다
빈곤과 불평등을 둘러싼 논란은 영미 선진국도 다르지 않다. 단지 영어로 논쟁해 우리가 잘 모를 뿐이다. 그 상반된 시각을 영국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이 몇 해 전 포브스 기고문에서 명료하게 요약했다.

“보수우파는 빈곤을 문제로 꼽는다. 답은 ‘부(富)의 창출’이라고 한다. 진보좌파는 불평등을 문제로 꼽는다. 답은 ‘부의 몰수’라고 한다. 우파는 부를 몰수하면 20세기 공산체제가 그랬듯이, 아무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신 수많은 사람을 빈곤에 빠뜨린다고 본다. 반면 좌파는 부의 창출이 늘 임금소득자보다 자본가에게 이롭고, 자유경제는 가난한 이들의 부를 부자들에게 이전한다고 응수한다.”

한국에도 딱 들어맞는다. 경제는 상수(常數)이지 변수가 아니다. 변하는 것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정치다. 어느 정파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경제와 국가의 정향도 확 달라진다.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을 평가한 언론들의 여론조사 결과는 대동소이했다. ‘외교안보는 합격점인데 경제는 겨우 낙제점을 면한 수준’이란 것이다. 일자리가 최악이고 경제지표 10개 중 8개가 나빠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언론들은 “남은 4년은 경제가 관건”이라고 조언한다.

경제는 중요하다. 정권 교체도 대개는 먹고사는 문제에 기인한다. 1992년 빌 클린턴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가 역대 최고 선거구호로 꼽히는 이유다. 하지만 이 구호를 만든 전략가 제임스 카빌이 지금이라면 이렇게 수정할 듯싶다.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It’s the politics, stupid!)”라고.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운용을 놓고 ‘386 실세들’과 마찰을 빚었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저서 제목을 《경제는 정치다》로 잡은 것은 솔직하고 적절했다. 그는 “경제에는 절대논리가 없다.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대한 선택이다. 모든 선택에는 이해관계자의 가치 판단이 담겨 있다. 그리고 언제나 타협과 조정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경제는 정치다”라고 썼다.

‘적폐 청산’ 구호 아래 현 정부의 경제 지향점은 뚜렷해지고 있다. 불평등 해소란 진보좌파의 프레임 아래 시장, 재벌오너, 경제관료에 대한 불신을 감추지 않는다. 시장원리는 신자유주의로 치부하고, 경쟁 활성화 대신 ‘큰 것’에 대한 규제의 칼을 들이댄다. ‘민영은 악, 국영은 선’이란 이분법도 확고하다. 의료 혁신은 공영화로, 철도 경쟁도 국가독점 체제로 회귀할 태세다.

재벌오너 불신도 확고하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재벌 개혁이 3~5년 내 마무리될 것”이란 어제 발언에는 뼈가 들어 있다. 참여연대 시절의 장하성, 김상조 교수와 자주 토론해 본 민간연구소 관계자는 “그들은 오너가 없는 일본식 재벌은 괜찮다는 게 지론”이라고 귀띔했다. 삼성에 대한 전방위 압박이나, ‘물컵 갑질’이 한진 오너일가 퇴진으로 비화된 배경도 감이 잡힌다.

경제관료 불신은 ‘노무현 실패’가 관료들에 포획된 탓이란 고정관념에서 비롯됐다. 핵심 포스트에는 관료가 안 보인다. 두 번 실패하고도 금융감독원장에 기어이 민간 출신을 앉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머릿속에 그린 대로 경제가 굴러가면 얼마나 좋겠나. 핵심 입안자들이 너무 관념적이란 점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냉정한 현실인식이 결여된 설계주의로 흐를 위험이 커서다. 글로벌 경제환경은 급변하는데 ‘경제에 정답이 있다’는 사고방식은 확증편향일 뿐이다.

외환위기 이후 20년간 성장잠재력 저하가 구조화됐다. 구조조정, 규제 혁신등 모든 경제현안을 정치문제로 치환하는 ‘경제의 정치화’는 고질병이다. 대통령 개헌안에서도 경제조항들에 정치색을 덕지덕지 입혔다.

노(老)제국 영국이 1980~1990년대 회생한 것은 보수당 대처리즘을 노동당 토니 블레어가 계승한 덕이다. 반면 한국에선 유구히 흐르는 경제를 대상으로 5년짜리 정권마다 너무 많은 실험을 한다. 지금 절실한 건 ‘정치의 경제화’와 미래 먹거리에 대한 고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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