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위기가 고조되면서 우리나라 근해에도 자주 출동하는 항공모함은 미국 군사력의 상징이다. 적성국 근해 출동 자체로 군사적 억지력이 되는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편성된 1개 선단은 웬만한 나라의 해군력 전체를 압도한다.

미 해군 항공모함은 축구장 3개 크기의 갑판을 보유한 초대형 군함이지만 바다에서는 조그만 점에 불과하다. 갑판에서 함재기가 뜨고 내리는 가운데 격납고에서 연료 보급, 무장 장착과 정비작업을 수행하는 분주하고 위험한 공간이다. 항공모함 이착륙은 최고의 베테랑 조종사들도 극도로 긴장하는 어려운 임무다. 만약 조그만 실수라도 발생하면 폭탄을 장착하고 연료를 가득 채운 함재기들이 폭발하는 대참사가 발생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장이라는 갑판 승무원들은 유니폼 색깔로 임무를 구분한다. 백색은 착륙, 노란색은 이륙, 붉은색은 무장, 보라색은 연료, 갈색은 정비 등으로 구분된 임무에 따라 다른 색깔의 유니폼을 입고 근무한다. 비행기들을 관제하는 브리지에서는 갑판을 축소한 보드 위에 다양한 표식을 곁들인 함재기 모형을 올려놓고 현황을 파악한다.

디지털 첨단기술이 집약된 항공모함의 핵심 운영정보가 유니폼 색깔과 함재기 모형이라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표시되는 이유는 단번에 직관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또 승무원과 비행기에 센서를 장착해 브리지의 대형스크린에 자동으로 표시하면 평상시에는 편리하지만 미사일이나 전자기탄 등에 피격돼 전원이 차단되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된다. 최신식 군함의 유저인터페이스(UI)가 아날로그 방식을 유지하는 배경이다.

항모의 사례는 디지털 기술이 발달할수록 아날로그 방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는 역설적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호모사피엔스는 수십만 년 동안 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 아날로그 세상에서 진화해 왔지만 디지털 시대는 불과 수십 년에 불과하다. 스크린에 숫자와 기호로 표시되는 디지털 방식이 편리하지만 친숙해지기는 어려운 이유다. 최근 트렌드로 부상하는 아날로그의 귀환도 같은 맥락이다. 기성세대들의 복고풍이 아니라 밀레니엄 세대들이 주축이 돼 음반시장에서 레코드판(LP)이 고속성장하고, 고급종이로 만든 필기노트와 보드게임이 각광받는 배경이다. 애플의 성공도 디지털 기술이 집약돼 있을수록 유저인터페이스 및 오프라인 매장 등 고객 접점은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케팅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위험관리 등 다양한 부문에서 고려돼야 하는 요소다.

지난해 5월 영국항공은 정보기술(IT)시스템 장애로 히드로공항과 개트윅공항의 모든 항공편을 취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항공사 체크인 데스크와 수하물 처리시스템이 다운되고 백업시스템도 부실해 사태가 커졌다. 800여 편의 항공편 운항이 취소되면서 손실액이 1억유로에 육박하고 고객 신뢰도 추락하는 피해를 입었다. 영국항공은 업계에서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운영효율 향상과 위험관리에 선두주자로 인정받고 있던 상황에서 더욱 의외였다.

추후 발표된 사고원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히드로공항 데이터센터를 수리하던 전기기사가 실수로 엉뚱한 케이블을 잘랐는데 하필이면 주요 전력선이었다. 첨단기술로 구축된 대형시스템이 사소한 ‘휴먼 에러’로 무력화된 사례다. 사후적이지만 복잡한 케이블들을 종류별로 피복선의 색깔을 다르게 시공만 했어도 이런 사고는 방지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20세기 후반 반도체와 인터넷으로 촉발된 정보화 혁명은 21세기 센서와 인공지능 주축의 4차 산업혁명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런 기술발전을 반영해 조직의 신경망에 비유되는 시스템이 대형화하고 복잡해지면서 지능화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작은 실수가 커다란 문제를 발생시키는 위험성도 증폭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시스템 자체의 기술 수준을 높이는 방법과 병행해 인간이 연관된 영역에서는 직관적 이해에 유리한 아날로그 인터페이스를 접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소비자 대상의 디지털 기기에서도 유효한 접근이다. 첨단 디지털 기기일수록 아날로그적 감각의 인터페이스로 마무리해야 완성도가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