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옷 사이즈를 아십니까?… '배너티 사이징' 마케팅의 비밀
잘 입던 바지가 요즘 헐렁해져서 허리둘레를 쟀다. ‘뱃살이 줄었나’ 하는 기대를 안고. 바지 사이즈보다 허리둘레가 2인치 더 굵었다. 그런데도 바지가 들어가는 게 신기했다. 심지어 남기까지 했다.

옷 제조사가 실수로 치수를 잘못 표기한 걸까. 유통업계 오랜 종사자에게 물어봤다. “패션업체들은 오래전부터 사이즈를 속이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33인치 바지에 30인치를 붙여 놓는 식이다. 전문 용어까지 있다. ‘배너티 사이징(vanity sizing)’이라고 불렀다. 옷 치수를 실제보다 작게 표기해 날씬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마케팅 기법이다.

1950년대 주로 활동한 미국 배우 마릴린 먼로의 사이즈는 8~10이었다. 한국 식으로 하면 66~77에 해당한다. 먼로는 키 166㎝, 허리 22인치, 몸무게 53㎏이었다. 가수 설현과 비슷한 체형이다. 지금 설현에게 77사이즈 옷을 입힌다면 턱없이 클 게 틀림없다. 먼로와 설현 사이의 세월 동안 옷 사이즈는 더 ‘친절하게’ 바뀌었다.

뉴욕타임스가 바지 1000여 벌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실제 사이즈 대비 최대 5인치까지 큰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도 비슷했다. 컨슈머리서치가 2015년 국내 주요 브랜드 옷을 조사했더니 같은 여성 55 사이즈라도 브랜드별로 최대 20㎝까지 차이가 났다.

패션업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잘 팔리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했다.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는 “잘생겼다” “예쁘다” 하며 외모 자존감을 높여줬다. 그런 뒤 새 옷을 줬더니 사이즈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았다. 다른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는 별다른 언급 없이 실제보다 큰 사이즈 라벨이 붙은 옷을 줬다. 그랬더니 외모 자존감이 낮아졌다. 더 중요한 사실은 새로 준 옷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큰 사이즈 옷만 봐도 멀리하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다.

패션업체들의 ‘사이즈 속이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곳도 있다. 온라인쇼핑몰과 TV 홈쇼핑에선 소비자가 입어보지 않고 주문하기 때문에 실제 사이즈와 차이가 나면 바로 반품이 들어온다. 반품률이 최대 40~50%에 달할 때도 있다고 한다.

작은 사이즈 라벨 옷이 기분을 좋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늘어난 뱃살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돼선 곤란하지 않을까. 일부 의사는 “패션업체들의 사이즈 속이기는 사회가 비만을 정상적인 상태로 받아들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