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들이 인사 등 사법행정권 전반에 영향을 행사하겠다고 나서면서 ‘판사 노조냐’는 비판에 직면했던 ‘전국법관대표회의’가 결국 상설화됐다. 하지만 대법관 회의를 거치면서 사실상 반쪽짜리 자문기구에 그쳤다는 평가다. 법관대표회의가 내놓은 상설화안이 법적 근거도 없이 사법행정에 대한 과도한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는 대법관들의 지적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권한 대폭 축소… 건의기구로 위상 축소

대법원은 22일 김명수 대법원장(사진)을 의장으로 하고 대법관 13명이 참여하는 대법관 회의를 열어 ‘전국법관대표회의 상설화’ 규칙안을 의결했다. 법관대표회의는 총 117명으로 정했다. 서울중앙지법에서 9명, 서울고법과 수원지법은 6명, 나머지 법원들은 3명의 대표판사를 선발한다. 임기는 1년으로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법원 관계자에 따르면 대법관 회의에서 다수 대법관이 상설화안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한 관계자는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대법원 규칙 제정만으로 법관들이 사법행정권을 행사하는 상설화안에 대해 일부 대법관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고 전했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지난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지면서 시작된 임시회의였다. 소집 당시부터 법적 근거가 없었다.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일부 법관이 주도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 따른 편향 우려도 제기됐다.
법관대표회의 측의 최초 ‘상설화 요구안’은 사법행정권 전반에 직간접 개입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대법원 내·예규에 대해 수정 변경 요구 △인사원칙에 대한 사전 설명 요구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인사 위원회의 위원 추천권 △사법행정권 남용 의심사례에 대한 조사 건의권 등 사법행정권 전반에 대한 개입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사법행정과 관련해 명시되지 않은 내용일지라도 의결을 통해 다룰 수 있다는 내용까지 담겨 ‘광범위한 개입’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대법관 회의에서 통과된 의결안은 법관대표회의의 ‘임무’를 사법행정 및 법관 독립에 관한 의견 표명과 사법행정에 대한 설명 요청으로 한정했다. 건의 기구로 위상이 축소된 것이다. 한 현직 부장판사는 “법관대표회의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대법관들이 브레이크를 건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법행정권’ 둘러싼 2라운드 시작

전국법관대표회의 측 송용승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법원조직법 등 관련 법령 개정과 정비를 통해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행사를 견제하고 민주적 사법행정을 구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의결기구로서의 성격과 위상을 갖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자문기구에 그쳤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향후 입법을 통해 실질적인 의결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는 분석이다.

법관대표회의가 자문 기구로 상설화되면서 사법행정권은 그대로 대법원장의 손에 남게 됐다는 평가다. 법조계 고위 관계자는 “김 대법원장이 명목적으로는 상설화를 추진했지만 자신이 권한을 가진 상태에서 굳이 대표회의에 힘을 나눠줄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진단했다.

정치권에서는 사법평의회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회 추천 8명, 법관 대표 6명, 대통령 추천 2명 등 총 16명 위원이 사법행정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제도다. 하지만 입법부가 사법부에 개입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관대표회의처럼 법원조직법과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 사법행정권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