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에서 발생한 독감(인플루엔자)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2년간 5000만 명이 사망했다. 전자현미경 덕분에 독감 바이러스를 분석할 수 있게 돼 예방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됐다. 공중위생 수준이 높아지면서 독감 사망률은 크게 낮아졌다. 팬데믹(전염병 대유행) 위험도 크게 줄었다. ‘스페인 독감’이 발생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독감은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질환이다. 매년 겨울철에 유행하며 인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올해는 유행 바이러스와 백신 바이러스가 다른 미스매치(불일치) 현상이 발생하면서 ‘백신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독감과 백신접종 효과 등에 관한 연구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봄철 독감 B형이 A형과 함께 유행

강추위 탓에 독감 환자가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둘째주(12월3~9일) 독감 의심환자는 외래환자 1000명당 19명이었으나 1월 첫째주(12월31~1월6일)에는 72.1명으로 한 달 새 3배 넘게 급증했다.

올해 독감 유행 양상은 예년과 다르다. 독감 바이러스는 A형, B형, C형으로 나뉜다. 흔히 겨울에 A형 독감이, 봄에 B형이 유행한다. 올겨울에는 이례적으로 A형과 B형이 동시 유행하고 있다. 김우주 고려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예년에는 12~1월에 A형 독감, 3~4월에 B형 독감이 유행했다”며 “이번 겨울엔 독감 환자 50% 이상이 B형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매년 남반구에서 유행하는 독감 바이러스를 분석해 북반구에서 유행할 바이러스를 예측, 발표한다. 올해는 A형/H3N2·H1N1과 B형 빅토리아가 유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필수 예방접종인 3가 백신에 이들 바이러스를 막는 항원을 넣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B형 야마가타가 유행하고 있다. 김 교수는 “현재 나와 있는 3가 독감백신으로는 야마가타 바이러스를 예방할 수 없다”며 “백신을 맞고도 독감에 걸린 환자들이 많다”고 했다.

백신 예방률 30%로 낮아져

건강한 사람의 독감 백신 예방률은 70% 정도다. 열 명 중 세 명은 백신을 맞아도 독감에 걸린다. 유행 바이러스와 백신 항원이 다르면 예방률은 더욱 낮아진다. 독감은 변이를 거듭하는 바이러스다. 올해 유행하는 H3N2는 변신을 잘해 아형이 많은 바이러스로 꼽힌다. 백신에 H3N2 항원이 들어 있다 해도 다른 아형이 유행하면 예방률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H3N2 변이 여부 등은 아직 확인할 수 없다”면서도 “미국은 올초 독감 백신 예방률이 30%로 낮다고 하는데 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했다.

남반구인 호주에서는 지난해 9월 백신 예방률이 10%에 불과하다는 발표가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유정란을 통한 백신 배양 과정에서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효과가 떨어질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 때문에 백신을 맞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접종해야 한다”고 했다. 임정우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이번 독감은 3~4월까지 유행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아직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사람은 백신을 맞는 게 좋다”고 했다. 이미 3가 백신을 맞았다면 4가 백신을 추가로 맞을 필요는 없다. 백신 간섭효과로 효능이 떨어질 수 있는 데다 B형 바이러스는 20% 정도 교차면역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백신효과 연구지원 등 절실

백신 접종 후에도 기침 예절을 지키고 손을 씻는 등 예방에 신경써야 한다. 독감에 걸렸다면 서둘러 항바이러스 치료를 받아야 한다. 독감으로 합병증이 생기는 것을 막고 추가 전파도 줄일 수 있다.

정부가 독감백신 접종에만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백신 효과 등에 관한 연구 지원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에서는 독감 백신 효과가 100~120일 정도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예방기간이 짧다면 국내에서 10월부터 시행하는 백신접종 시기를 조정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독감 백신 효과, 독감 사망자 통계 등의 연구 지원이 국가 차원에서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교수는 “매년 독감 환자가 몰리는 시기에 부족한 의료 자원 문제도 어떻게 해결할지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