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브시스터즈가 개발한 모바일게임 ‘쿠키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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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10억원, 영업손실 18억원.’

게임개발사인 데브시스터즈의 2011년 성적표다. 2007년 설립된 이 회사는 창업 2년차까지 제대로 이익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회사는 기업 가치를 160억원으로 평가받으며 벤처캐피털(VC)인 소프트뱅크벤처스 등으로부터 40억원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2013년 데브시스터즈는 모바일게임 ‘쿠키런’을 선보이며 화제의 기업이 됐고 같은 해 매출 613억원, 영업이익 240억원을 기록했다. 이듬해 회사는 코스닥시장에 입성했다. 데브시스터즈에 투자한 소프트뱅크벤처스의 이은우 상무는 “당시 투자방식이 상환전환우선주(RCPS)였기 때문에 적자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투자가 가능했다”며 “보통주 투자라면 적자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RCPS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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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투자에서 RCPS를 활용하는 사례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VC의 RCPS 투자 비중은 2006년 27.1%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해 올해 10월 44.9%를 차지했다. RCPS는 투자자가 일정 기간 뒤 투자금 상환을 요청할 수 있는 상환권과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환권, 회사 청산이나 인수합병(M&A) 시 잔여재산이나 매각대금 분배에 보통주보다 유리한 권리를 가지는 우선권을 가지고 있는 ‘종류주식(보통주와 다른 주식)’이다.

한국보다 해외 스타트업 강국에서 주요 투자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의 상위 10개 VC 중 9곳이 우선주 중심 투자를 지향하고 있다. 이 중 3곳은 우선주 투자 비중이 100%다. 미국 전체 VC의 우선주 투자 비중은 90%를 넘어선다.

스마트 스터티가 제작한 유아용 콘텐츠 '핑크퐁 상어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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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RCPS 투자가 세계적으로 VC들에 인기를 끄는 이유는 투자자들에게 합리적인 ‘안전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RCPS는 회사가 부도날 경우에는 투자자들도 100%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회사가 망해도 상환 권리가 있는 전환사채(CB)보다는 위험한 투자 방식이다. 대신 회사가 기대치에 못 미치는 성장을 했을 경우나 낮은 가격에 M&A될 경우 RCPS 투자자들은 보통주보다 안전하게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VC가 기업가치를 100억원으로 평가한 A사 지분 20%를 20억원에 확보했다고 가정하자. 향후 회사가 성장하지 못하고 기업가치 20억원에 매각되면 투자자는 20%인 4억원만 회수하게 된다. 창업자는 회사 가치를 떨어뜨렸는데도 16억원을 회수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RCPS 투자의 경우 우선권이 존재해 같은 사례에서 투자자에게 먼저 회사 매각대금이 지급된다. 보통주보다 더 많은 금액을 회수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벤처 캐피털] 유니콘 기업 키우는 'RCPS'… 기업·투자자 상생 이끈다
◆유니콘 양성에 적합한 투자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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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안전장치’는 어떻게 보면 창업자에게 불리한 조건처럼 보인다. 반면에 창업자가 회사를 무조건 성장시켜야만 하는 유인책을 제공하기도 한다. 투자자는 투자 회수의 안정성이 생기기 때문에 더 많은 자금을 초기에 투입할 수 있다. 대규모 투자유치가 초기 창업기업을 유니콘으로 성장시키는 사례가 많다. 배달의민족, 쿠팡과 같은 기업들이 적자상태에도 대규모 투자유치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RCPS 안전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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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는 “RCPS 조항들이 창업자에게 불리하다는 시각이 있지만 오히려 투자자는 안전하게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창업자는 회사를 더 성장시키는 유인책으로 작용한다”며 “보통주 투자의 불합리성을 개선한 것이 RCPS”라고 말했다.

RCPS의 ‘리픽싱’ 기능과 지분희석 방지 기능도 투자자와 회사의 상생을 돕는 요소다. RCPS는 기업가치를 두고 투자자와 창업자 간 의견차이가 발생했을 때 이 간극을 좁혀줄 수 있다. A사를 창업한 대표는 회사의 가치를 50억원이라고 생각하지만 투자자는 30억원이 적당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보통주는 무조건 기업가치를 투자시점에 산정해야 하지만 RCPS는 이럴 경우 30억~50억원의 밴드 형태로 기업가치를 산정하고 이후 회사의 성장 여부를 보고 기업가치를 수정할 수 있다.

회사는 성장성을 측정하는 마케팅 수치, 고객 수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성과지표를 정할 수 있고 보다 세부적으로 회사 운영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VC는 이 성과 달성 여부를 보고 추후 기업가치를 조정하기 때문에 당장 투자에 대한 위험을 고스란히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

◆다양해지는 투자수단

중소기업벤처부는 이 같은 투자수단을 더 활성화하기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활용되고 있는 조건부지분투자(SAFE)를 도입하기로 했다. SAFE는 전환조건과 기업가치 범위 정도만 포함한 단순 계약 형태의 투자다. RCPS는 투자 당시 기업가치를 밴드 형태로 설정하고, 상환, 전환, 우선 등의 조건을 합의한다. 하지만 SAFE는 모든 조건을 미리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투자한 뒤 회사의 성장 여부를 보고 세부 요소들을 정해나갈 수 있다. RCPS로 투자를 전환하기 위한 사전투자기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은우 상무는 “보통주로 VC에 투자하라고 하면 투자금액도 줄어들고 보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어 투자 자체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며 “RCPS나 SAFE 등 다양한 투자수단을 활용하면 VC들이 대규모 투자를 집행할 수 있는 유인책이 된다”고 말했다.

김태호 기자 highk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