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민간협회에 다니는 박모 주임(28)은 최근 팀장으로부터 ‘특명’을 받았다. ‘뻔한’ 송년회 대신 캠핑을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팀원들은 곧바로 ‘1박2일파’와 ‘당일치기파’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벌였다. 1박2일 캠핑으로 바람이나 쐬자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휴일을 회사 사람들과 보낼 수는 없다”며 당일치기를 고집하는 팀원도 많았다. 1주일 내내 팀원들에게 시달리던 그는 결국 신경성위염 진단까지 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박 주임은 “막내인 저에게 다들 왜 이러는 걸까요”라며 답답해했다.
[김과장 & 이대리] "색다른 송년회 어때?" 막내에 내려진 특명
연말 송년회의 계절이 다가왔다. 매년 돌아오는 송년회지만 김과장 이대리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부어라 마셔라’식 송년회는 줄었다지만 장소 섭외부터 단합을 위한 이벤트, 행사 진행까지 챙기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소위 ‘꼰대’가 되지 않으려는 윗사람들의 ‘신세대 송년회’ 주문에 할 일만 늘었다는 푸념도 적지 않다. 송년회를 앞둔 직장인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송년회까지 아이디어 내야 하나요”

예전 송년회는 단순했다. 단골식당을 예약하고 술만 먹으면 됐다. 연말 건강만 유지하면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요즘엔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과음하지 않으면서 분위기도 좋아야 하고, 평범하지 않은 송년회를 주문하는 상사들이 늘면서다. 당연스레 연차가 낮은 팀원들은 송년회 준비에 머리를 싸매기 일쑤다.

한 석유화학업체에 근무하는 이모 과장은 송년회 장소로 클럽 분위기가 나는 볼링장을 예약했다. “젊은 사람들 노는 곳에서 송년회를 해보자”는 부문장의 주문 때문이다. 볼링장 예약은 해놨지만, 어떤 이벤트를 열지가 문제였다. 막내급 직원들이 따로 모여 회의까지 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수차례 회의 끝에 볼링을 치고 간단하게 맥주를 한잔 더 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이 과장은 “송년회 준비를 하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푸념했다.

회식 대신 워크숍이나 등산, 영화 관람 등 차별화된 송년회가 오히려 더 피곤하다는 하소연도 많다. 한 정보기술(IT) 회사에서 근무하는 이모 대리는 최근 한 주 내내 부서 MT 장소를 물색하느라 진땀을 뺐다. 부장이 송년회 대신 좋은 공기를 마시며 오붓하게 야유회나 즐기자고 말하면서다.

이 대리는 “차라리 작년 회식처럼 송년회를 하면 서너 시간 안에 끝났을 텐데, 괜히 야유회를 가자고 해 골치만 더 아파졌다”며 “야유회 가기를 꺼리는 팀원들이 괜히 나한테만 눈총을 보내 더 힘들다”고 토로했다.

‘중간’은 없다… 양극화된 송년회

최근 송년회는 없어지거나 단출하게 보내는 직장이 많아지고 있긴 하다. 회사 차원의 공식 송년모임을 없애고 부서별 간단한 저녁식사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곳이 늘고 있는 분위기다. 저녁식사도 1차만 하고 해산하는 식이다. 조용한 송년회를 강조하는 곳도 많아지고 있다.

패션회사에 다니는 김모씨는 단체로 송년회 대신 영화 관람을 하기로 했다. 퇴근하고 영화관에서 핫도그 등 저녁을 먹으며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일각에선 “그게 무슨 송년회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만족해하는 분위기다. 김씨는 “결국 무늬만 송년회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부어라 마셔라 식의 송년회보다는 나으니까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아예 송년회를 ‘없던 일’로 한 곳도 늘고 있다. 최근 한샘 성폭행 사건 등으로 인해 직장 내 성희롱이 사회문제화되면서다. 한 대기업 팀장은 “오랫동안 술잔이 오가다보면 괜한 뒷말만 생기고 사고만 날 것 같아 올해 송년회는 안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반면 더 거창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전통적인 송년회 대신 낚시나 캠핑 등 ‘익스트림 송년회’를 주문하는 상사들이 늘면서다. 한 중소기업 기획팀은 벌써 2년째 송년회를 바닷가에서 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낚시를 좋아하는 팀장이 바닷가 송년회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강원 속초에서 충남 태안으로 장소만 바뀌는 식이다. 팀원들은 송년회만 하면 찬 바닷바람 탓에 감기에 걸린다고 한다. 이 회사에 다니는 김 과장은 “송년회 때마다 밤새 술을 마신 뒤 다음날 새벽 배를 타고 바다낚시를 가면 숙취와 뱃멀미로 죽을 지경”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기자랑 또 준비하는 ‘중고 신입’

이직이 활발해지면서 늘어난 ‘중고신입’들은 송년회가 더 두렵다. 서먹한 팀원들과 하루나 이틀을 같이 보내는 게 어색해서다. 컨설팅업계에서 일하다가 올해 초 직원 대부분이 여성인 패션업체로 이직한 성모씨는 “술도 술이지만 장기자랑을 하면서 더 어색했던 것 같다”며 “때론 왁자지껄했던 전 직장이 그리워진다”고 말했다. 그는 “일할 땐 경력 직원인데 송년회 땐 신입사원이 된다”며 “이직할 때마다 반복되는 신입사원 장기자랑은 100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