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는 1997년 IBM 슈퍼컴퓨터 ‘딥블루’와 체스 경기를 벌였다. 카스파로프는 1년 전 첫 번째 대결에서 이미 승리를 거둔 만큼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충격적 패배였다. 이 일은 가장 고도화된 두뇌 게임에서 인간 챔피언을 무너뜨린 기계의 등장과 인공지능(AI) 시대의 개막을 알린 사건이었다. 이로부터 19년 뒤인 지난해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과 구글 ‘알파고’의 대결은 AI 기술 발전은 물론 두려움까지 느끼게 했다.

카스파로프는 《딥 씽킹》에서 딥블루와의 대결을 복기하며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물음을 던진다. 그는 “기계가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2005년 은퇴 후 비즈니스 리더들을 대상으로 강연과 저술 작업을 하고 있는 그는 2013년부터 옥스퍼드대 인류미래연구소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연구하고 있다.

그는 20년 전 딥블루와의 경기를 복기하며 기계와의 대결이 가져온 생소함, 불안감, 좌절감에 대해 이 책에서 얘기한다. 게임을 치르는 여섯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시계 초침 소리에 조급함을 느끼지 않으며,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일도 없는 상대와 겨루는 것은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이길 수 없다면 함께하라”며 인간과 기계의 협력을 강조한다. 이제 인간과 기계가 경쟁하는 시대는 끝났고 기계의 발전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인 만큼 두려워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기계와 기술의 힘을 빌려 인간 능력의 도약대로 삼자고 주장한다.

2005년 ‘어드밴스드 체스 대회’는 인간과 기계가 협력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보여준 사례다.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이나 컴퓨터와 함께 팀을 이뤄 게임을 했다. 이 대회 우승자는 딥블루처럼 체스에 특화된 슈퍼컴퓨터를 가지고 나온 프로 체스기사가 아니었다. 컴퓨터 3대를 동시에 가동한 미국의 아마추어 기사 2명이었다. 컴퓨터의 전술적 정확성과 인간의 전략적 창조성 간 조합이 게임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였다. 그는 이에 대해 “‘약한 인간+기계+뛰어난 프로세스’는 어떤 슈퍼컴퓨터보다 강하다”고 말한다.

앞으로 AI 때문에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직업군으로 인간과 기계 사이의 협력을 설계하는 분야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기계에 더 많은 과제를 맡기고 인간은 더 깊게, 더 넓게 생각하며 창조적인 활동에 집중하라는 얘기다. 그는 “AI가 다양한 인간 활동을 대체하는 단계를 넘어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