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34년 공직생활 후 '퇴계의 길' 따르는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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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범절 지키는 선비정신이 한국사회 갈등 '치유'할 것"
퇴계에 반해, 안동에 살다
통계청장·기획예산처 장관 지낸 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맡아
"안동에 머물며 퇴계 가르침 공부했죠"
퇴계의'일상적 삶' 에 감동
유교 기반 둔 조선의 선비문화
가부장적인 면도 있지만 퇴계는 신분 귀천 따지지 않아
"21세기에도 선비정신 필요"
많은 사람들 선비와 양반 헷갈려 해
선비는 지·덕 겸비한 인격적인 개념
"현대인에게도 훌륭한 롤모델이죠"
퇴계에 반해, 안동에 살다
통계청장·기획예산처 장관 지낸 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맡아
"안동에 머물며 퇴계 가르침 공부했죠"
퇴계의'일상적 삶' 에 감동
유교 기반 둔 조선의 선비문화
가부장적인 면도 있지만 퇴계는 신분 귀천 따지지 않아
"21세기에도 선비정신 필요"
많은 사람들 선비와 양반 헷갈려 해
선비는 지·덕 겸비한 인격적인 개념
"현대인에게도 훌륭한 롤모델이죠"
경북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북동쪽으로 40분가량 달리다보면 개울이 하나 나온다. 도산면 토계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토계천(土溪川)이다. 조선시대 유학자 퇴계 이황은 15년 관직 생활을 내던지고 내려와 이 토계천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이때 토계를 퇴계(退溪)라 고치고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물러나는 시냇물’이란 뜻이다.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1570년 퇴계가 69세 나이로 세상을 뜨고 447년이 지났지만 이곳 토계리에는 아직도 그를 기리고, 그와 같은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 34년간 공직 생활을 하다 안동에 내려온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72)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퇴계 후손들이 세운 선비문화수련원은 토계천 오른쪽 퇴계종택 너머 산등성이에 있다. 이곳에서 만난 흰 두루마기 차림의 그는 “선비 정신의 핵심은 박기후인(薄己厚人), 즉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다’는 것”이라며 “요즘 말로 하면 ‘서번트 리더십(섬김의 리더십)’으로 선비 정신만 잘 지켜도 ‘갑질 문화’ 등 한국 사회의 병폐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우연히 맡게 된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김 이사장은 “안동에 내려와 퇴계 선생의 일화를 가까이서 듣고 삶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큰 감동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며 “그에 견줘 내 삶을 돌아보면 부끄럽고 후회가 많이 된다”고 했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제10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엘리트 경제 관료의 길을 걸었다. 통계청장과 조달청장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4~2005년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냈다.
“어린 시절 경북 상주에서 자랄 때 동네 어른들에게 퇴계 선생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도산서원을 처음 찾은 건 1966년 대학 고적답사반 일행과 함께였죠. 이후에도 종종 퇴계종택과 도산서원을 찾았지만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서울에서 안동까지 먼 길을 내려와 도산서원과 퇴계종택을 둘러보고 가는 그를 눈여겨본 선비문화수련원 이사회는 2007년 그에게 이사장 자리를 권했다. 그는 퇴계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고, 어르신들에 비해 나이도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평이사만 맡기로 했다.
“이듬해 일이 터졌어요. 1월 하순 정기 이사회를 앞둔 때였습니다. 추운 겨울 새벽에 어둠 속을 빨리 걷다 넘어져 무릎 골절상으로 6주간 깁스를 해야 했어요. 전혀 외출할 수 없어 이사회도 못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없는 사이 총회와 이사회에서 저를 이사장으로 결정해버린 거예요. 이제는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받아들였죠.”
그는 2008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제2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비상근인 이사장은 원래 안동에 내려가 살 필요가 없다.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이사회만 참석하면 된다. 그러나 그는 이사장을 맡은 김에 퇴계 선생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 안동에 내려오던 것이, 매주 두 번으로 늘었고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내고 있다.
서원호 선비문화수련원 기획홍보실장의 말에 따르면 그는 선비문화수련원에서 관리실 용도로 만든 작은 방에서 잠을 잔다. 원래 1박2일 머무는 수련원생을 위한 방 가운데 하나를 개조해 이사장 숙소를 만들려 했지만, 넓은 방이 필요 없고 수련원생을 위한 방이 줄어든다고 김 이사장이 거절했다고 한다.
유학자이기에 앞서 진솔한 삶 보인 데 감동
김 이사장은 “많은 사람이 퇴계 이황을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내게 큰 감동을 준 것은 학자로서의 퇴계가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의 퇴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퇴계는 첫째 부인이 둘째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 뒤 둘째 부인을 맞았다. 이 권씨 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제사상에 놓인 배 하나를 치마폭에 감추다 들키는가 하면, 문상(問喪) 가는 퇴계의 도포자락이 해졌다면서 붉은 천을 덧대 꿰맸다. 퇴계는 한 번도 성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렇지 않게 붉은 천을 덧댄 도포를 입고 문상을 갔다오고, 권씨 부인이 제사상에서 배를 훔쳤을 땐 형수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손수 배를 깎아줬다는 것이다.
“퇴계는 누구나 존경하는 대학자였습니다. 네 명에 걸친 조선 왕들이 그에게 벼슬을 주면서 모시고 싶어 안달했죠. 지금으로 치면 ‘갑 중의 갑’이에요. 하지만 퇴계 선생은 신분이나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유교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 선비문화가 가부장적이고 위계질서를 강조한다는 것은 오해라고 말했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오랫동안 신분제 사회에 살았어요. 영국은 1928년에야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줬고, 미국은 1950년대까지 버스에 백인 전용 좌석이 있었어요.”
공자는 유교무류(有敎無類)라 했다.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으며,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을 열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김 이사장은 퇴계가 유교무류를 누구보다 잘 실천한 인물이라고 했다. 경북 영주 순흥에 살던 대장장이 배순(裵純)이 매일같이 소수서원(당시 백운동서원) 뜰아래 서서 강의를 듣는 것을 보고 퇴계가 제자로 받아들여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퇴계에겐 신분의 귀천이 없었어요. 퇴계 선생이 67세 되던 해에 증손자를 얻었는데 손자며느리의 젖이 부족해 증손자가 영양 실조 증세를 보였습니다. 이에 손자가 막 아기를 낳은 여종 학덕이를 서울로 보내달라고 했죠. 학덕이도 서울로 가겠다고 했지만 퇴계는 ‘남의 자식을 죽여서 자기 자식 살리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는 근사록의 글귀를 들어 강하게 반대했어요. 결국 증손자는 두 돌을 갓 넘기고 죽고 말았습니다.”
“퇴계는 21세기에도 훌륭한 롤모델”
퇴계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다. 이(理)는 형이상학적, 기(氣)는 형이하학적인 것을 가리킨다. 김 이사장은 퇴계의 이론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키가 다르듯 ‘기’도 사람마다 다른데, 그렇다고 이를 토대로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퇴계는 사람이 누구나 형이상학적으로 소중한 존재고, 모든 사람은 하늘로부터 고귀한 품성을 받은 존재라고 봤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나왔습니다. 나이 어린 제자가 찾아와도 직접 맞이하러 문 밖까지 나가곤 했죠.”
이는 퇴계 16대 종손인 이근필 옹(翁)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올해 여든여섯 된 분이신데 선비문화수련원생들이 퇴계종택에 찾아가면 젊은 사람이건 나이든 사람이건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아주 큰절로 맞이해요. 무릎 꿇고 앉아서 40~50분씩 얘기하는데, 조상 자랑처럼 들릴까봐 퇴계 선생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불가장(傲不可長: 오만한 행동은 키우지 말라)’ 등 여러 고사성어를 손수 붓글씨로 써 나눠줍니다.”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이육사(이활)도 퇴계 14대손으로 퇴계 집안에는 이런 선비 정신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많이 헷갈려 하는데 선비와 양반은 다르다”고 했다. 양반은 문반과 무반의 벼슬아치와 그 자손을 일컫는 신분인 데 비해 순우리말인 선비는 지와 덕을 겸비하고 의리와 범절을 지키며 사는 인격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는 “선비 정신은 반목과 갈등, 차별과 괄시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정신”이라며 “퇴계 선생이 선비 정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를 잘 구현하고 실천한 인물로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도 훌륭한 롤모델”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일 오전 5시30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숙소를 나와 1시간 반 정도 도산서원과 퇴계 생가 등을 산책하며 퇴계 선생의 시(詩)를 외운다. 그러다 보니 2300여 수에 이르는 퇴계의 시 가운데 180여 수를 외우게 됐다고 한다. 그는 애송하는 퇴계 시 가운데 하나라는 ‘수천(修泉)’을 읊었다. “어제는 샘을 쳐서 맑고 깨끗했는데/오늘 아침 다시 보니 반절쯤 흐려졌네/알겠구나, 맑은 물도 사람 힘에 달렸으니/공들이길 하루라도 그치지 말아야 함을.”
■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 발자취 따라가면 자연스레 선비정신 배워
올 9월까지 9만여명 찾아 경북 안동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 후손들이 2001년 퇴계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남은 종잣돈을 모아 설립했다. 교육 첫해인 2002년에는 224명이 교육을 받았지만 2010년에는 1만2000여 명으로 늘었고, 지난해까지 총 33만여 명의 직장인과 군인, 중·고등학생, 초등학생 등이 수련을 받았다. 올해는 지난 9월까지 9만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
처음에는 퇴계종택 인근 민간시설을 빌려서 교육했다. 찾는 사람이 늘면서 국비와 지방비를 지원받아 숙소와 강의실을 갖춘 건물 1원사를 2011년, 2원사를 2016년 지었다.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은 “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강의만 듣는 방식이 아니라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등 퇴계 이황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는 현장을 둘러보면서 자연스럽게 선비 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한 덕분에 큰 호응을 얻은 것 같다”고 했다.
군인들은 하루 만에 자기 부대로 돌아가지만, 직장인과 학생들은 1박2일 혹은 2박3일 머물면서 교육을 받는다. 지난 6~7월에도 신한은행, 포스코, 서울시, 울산시, 부산 동일중앙초등학교, 전북 순창 복흥중학교 등에서 이곳을 찾았다. 수련원생들은 유건(儒巾)에 도포 차림으로 입교한 뒤 도산서원 답사, 퇴계의 심신수련법인 ‘활인심방’ 실습, 명상길 걷기, 퇴계 종손과의 대화, 하계마을 유적지 탐방, 이육사 문학관 방문 등을 한다.
김 이사장은 “지금 도산서원과 퇴계종택은 부지가 넓지만 이는 모두 퇴계 선생 사후에 지어진 것으로, 퇴계 선생 자신은 조그만 도산서당과 좁은 방에서 기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며 “퇴계 선생의 청렴함과 겸손, 그리고 현재 살아 있는 퇴계 16대 종손 이근필 옹 등의 모습을 보면서 수련원생들은 저절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1570년 퇴계가 69세 나이로 세상을 뜨고 447년이 지났지만 이곳 토계리에는 아직도 그를 기리고, 그와 같은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 34년간 공직 생활을 하다 안동에 내려온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72)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퇴계 후손들이 세운 선비문화수련원은 토계천 오른쪽 퇴계종택 너머 산등성이에 있다. 이곳에서 만난 흰 두루마기 차림의 그는 “선비 정신의 핵심은 박기후인(薄己厚人), 즉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다’는 것”이라며 “요즘 말로 하면 ‘서번트 리더십(섬김의 리더십)’으로 선비 정신만 잘 지켜도 ‘갑질 문화’ 등 한국 사회의 병폐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우연히 맡게 된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김 이사장은 “안동에 내려와 퇴계 선생의 일화를 가까이서 듣고 삶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큰 감동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며 “그에 견줘 내 삶을 돌아보면 부끄럽고 후회가 많이 된다”고 했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제10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엘리트 경제 관료의 길을 걸었다. 통계청장과 조달청장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4~2005년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냈다.
“어린 시절 경북 상주에서 자랄 때 동네 어른들에게 퇴계 선생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도산서원을 처음 찾은 건 1966년 대학 고적답사반 일행과 함께였죠. 이후에도 종종 퇴계종택과 도산서원을 찾았지만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서울에서 안동까지 먼 길을 내려와 도산서원과 퇴계종택을 둘러보고 가는 그를 눈여겨본 선비문화수련원 이사회는 2007년 그에게 이사장 자리를 권했다. 그는 퇴계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고, 어르신들에 비해 나이도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평이사만 맡기로 했다.
“이듬해 일이 터졌어요. 1월 하순 정기 이사회를 앞둔 때였습니다. 추운 겨울 새벽에 어둠 속을 빨리 걷다 넘어져 무릎 골절상으로 6주간 깁스를 해야 했어요. 전혀 외출할 수 없어 이사회도 못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없는 사이 총회와 이사회에서 저를 이사장으로 결정해버린 거예요. 이제는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받아들였죠.”
그는 2008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제2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비상근인 이사장은 원래 안동에 내려가 살 필요가 없다.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이사회만 참석하면 된다. 그러나 그는 이사장을 맡은 김에 퇴계 선생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 안동에 내려오던 것이, 매주 두 번으로 늘었고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내고 있다.
서원호 선비문화수련원 기획홍보실장의 말에 따르면 그는 선비문화수련원에서 관리실 용도로 만든 작은 방에서 잠을 잔다. 원래 1박2일 머무는 수련원생을 위한 방 가운데 하나를 개조해 이사장 숙소를 만들려 했지만, 넓은 방이 필요 없고 수련원생을 위한 방이 줄어든다고 김 이사장이 거절했다고 한다.
유학자이기에 앞서 진솔한 삶 보인 데 감동
김 이사장은 “많은 사람이 퇴계 이황을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내게 큰 감동을 준 것은 학자로서의 퇴계가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의 퇴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퇴계는 첫째 부인이 둘째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 뒤 둘째 부인을 맞았다. 이 권씨 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제사상에 놓인 배 하나를 치마폭에 감추다 들키는가 하면, 문상(問喪) 가는 퇴계의 도포자락이 해졌다면서 붉은 천을 덧대 꿰맸다. 퇴계는 한 번도 성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렇지 않게 붉은 천을 덧댄 도포를 입고 문상을 갔다오고, 권씨 부인이 제사상에서 배를 훔쳤을 땐 형수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손수 배를 깎아줬다는 것이다.
“퇴계는 누구나 존경하는 대학자였습니다. 네 명에 걸친 조선 왕들이 그에게 벼슬을 주면서 모시고 싶어 안달했죠. 지금으로 치면 ‘갑 중의 갑’이에요. 하지만 퇴계 선생은 신분이나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유교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 선비문화가 가부장적이고 위계질서를 강조한다는 것은 오해라고 말했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오랫동안 신분제 사회에 살았어요. 영국은 1928년에야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줬고, 미국은 1950년대까지 버스에 백인 전용 좌석이 있었어요.”
공자는 유교무류(有敎無類)라 했다.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으며,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을 열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김 이사장은 퇴계가 유교무류를 누구보다 잘 실천한 인물이라고 했다. 경북 영주 순흥에 살던 대장장이 배순(裵純)이 매일같이 소수서원(당시 백운동서원) 뜰아래 서서 강의를 듣는 것을 보고 퇴계가 제자로 받아들여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퇴계에겐 신분의 귀천이 없었어요. 퇴계 선생이 67세 되던 해에 증손자를 얻었는데 손자며느리의 젖이 부족해 증손자가 영양 실조 증세를 보였습니다. 이에 손자가 막 아기를 낳은 여종 학덕이를 서울로 보내달라고 했죠. 학덕이도 서울로 가겠다고 했지만 퇴계는 ‘남의 자식을 죽여서 자기 자식 살리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는 근사록의 글귀를 들어 강하게 반대했어요. 결국 증손자는 두 돌을 갓 넘기고 죽고 말았습니다.”
“퇴계는 21세기에도 훌륭한 롤모델”
퇴계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다. 이(理)는 형이상학적, 기(氣)는 형이하학적인 것을 가리킨다. 김 이사장은 퇴계의 이론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키가 다르듯 ‘기’도 사람마다 다른데, 그렇다고 이를 토대로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퇴계는 사람이 누구나 형이상학적으로 소중한 존재고, 모든 사람은 하늘로부터 고귀한 품성을 받은 존재라고 봤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나왔습니다. 나이 어린 제자가 찾아와도 직접 맞이하러 문 밖까지 나가곤 했죠.”
이는 퇴계 16대 종손인 이근필 옹(翁)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올해 여든여섯 된 분이신데 선비문화수련원생들이 퇴계종택에 찾아가면 젊은 사람이건 나이든 사람이건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아주 큰절로 맞이해요. 무릎 꿇고 앉아서 40~50분씩 얘기하는데, 조상 자랑처럼 들릴까봐 퇴계 선생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불가장(傲不可長: 오만한 행동은 키우지 말라)’ 등 여러 고사성어를 손수 붓글씨로 써 나눠줍니다.”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이육사(이활)도 퇴계 14대손으로 퇴계 집안에는 이런 선비 정신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많이 헷갈려 하는데 선비와 양반은 다르다”고 했다. 양반은 문반과 무반의 벼슬아치와 그 자손을 일컫는 신분인 데 비해 순우리말인 선비는 지와 덕을 겸비하고 의리와 범절을 지키며 사는 인격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는 “선비 정신은 반목과 갈등, 차별과 괄시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정신”이라며 “퇴계 선생이 선비 정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를 잘 구현하고 실천한 인물로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도 훌륭한 롤모델”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일 오전 5시30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숙소를 나와 1시간 반 정도 도산서원과 퇴계 생가 등을 산책하며 퇴계 선생의 시(詩)를 외운다. 그러다 보니 2300여 수에 이르는 퇴계의 시 가운데 180여 수를 외우게 됐다고 한다. 그는 애송하는 퇴계 시 가운데 하나라는 ‘수천(修泉)’을 읊었다. “어제는 샘을 쳐서 맑고 깨끗했는데/오늘 아침 다시 보니 반절쯤 흐려졌네/알겠구나, 맑은 물도 사람 힘에 달렸으니/공들이길 하루라도 그치지 말아야 함을.”
■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 발자취 따라가면 자연스레 선비정신 배워
올 9월까지 9만여명 찾아 경북 안동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 후손들이 2001년 퇴계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남은 종잣돈을 모아 설립했다. 교육 첫해인 2002년에는 224명이 교육을 받았지만 2010년에는 1만2000여 명으로 늘었고, 지난해까지 총 33만여 명의 직장인과 군인, 중·고등학생, 초등학생 등이 수련을 받았다. 올해는 지난 9월까지 9만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
처음에는 퇴계종택 인근 민간시설을 빌려서 교육했다. 찾는 사람이 늘면서 국비와 지방비를 지원받아 숙소와 강의실을 갖춘 건물 1원사를 2011년, 2원사를 2016년 지었다.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은 “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강의만 듣는 방식이 아니라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등 퇴계 이황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는 현장을 둘러보면서 자연스럽게 선비 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한 덕분에 큰 호응을 얻은 것 같다”고 했다.
군인들은 하루 만에 자기 부대로 돌아가지만, 직장인과 학생들은 1박2일 혹은 2박3일 머물면서 교육을 받는다. 지난 6~7월에도 신한은행, 포스코, 서울시, 울산시, 부산 동일중앙초등학교, 전북 순창 복흥중학교 등에서 이곳을 찾았다. 수련원생들은 유건(儒巾)에 도포 차림으로 입교한 뒤 도산서원 답사, 퇴계의 심신수련법인 ‘활인심방’ 실습, 명상길 걷기, 퇴계 종손과의 대화, 하계마을 유적지 탐방, 이육사 문학관 방문 등을 한다.
김 이사장은 “지금 도산서원과 퇴계종택은 부지가 넓지만 이는 모두 퇴계 선생 사후에 지어진 것으로, 퇴계 선생 자신은 조그만 도산서당과 좁은 방에서 기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며 “퇴계 선생의 청렴함과 겸손, 그리고 현재 살아 있는 퇴계 16대 종손 이근필 옹 등의 모습을 보면서 수련원생들은 저절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