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민연금, 한국 기업들과 대화하라
필자는 2016년 여름 시중은행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으로 지정된 한 중소기업을 컨설팅한 적이 있다. 이 회사 사장은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공구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손재주 많은 기술자였다. 이런 저런 장사로 종잣돈을 모은 뒤 국내 최초로 지하철 안전문(스크린도어)을 제작·납품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기술이나 가격 면에서 선진국 업체에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췄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 지하철 안전문 시장 1위 업체가 됐다.

국내 시장이 성숙해 성장이 정체하자 그는 고민에 빠졌다. 회사를 접고 이제까지 번 100억원 가까운 돈으로 소도시에서 작은 건물을 사 횟집이나 할까, 아니면 아직까지 안전문이 없는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인가. 그 사장은 해외진출을 택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직원들을 전부 해고해야 하는 아픔을 겪고 싶지 않은 게 그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필자가 그를 만난 건 해외진출을 결정한 지 3년이 지나서였다. 회사가 인도 뉴델리 지하철의 안전문 사업 수주를 눈앞에 둔 때였다. 하지만 이 기간 회사는 라이선스를 따고, 국가별 기술 검증을 위한 각종 인증서를 확보하고, 마케팅 등에 시행착오를 겪느라 시간을 소비했다. 이 과정에서 회사 자금은 바닥을 드러냈고 은행 이자조차 연체돼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그 결과 그의 본래 뜻과 달리 직원들을 해고하는 아픔을 맛봤다.

이 회사 이야기에서 한국의 성장성 있는 기술 중소기업들이 해외진출에 나설 때 직면하는 중요한 문제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세계 1%에 불과한 국내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축적한 자본은 세계 시장에 진출할 체력을 충분히 뒷받침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국 시장에서 100억원으로 성공했다면 세계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1000억원의 자금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한국의 많은 중소기업이 해외시장에 도전한 걸 후회하고 통탄할 때 한국의 자본은 어디에 있었나? 다른 자본은 차치하고라도 우리 국민이 십시일반 모은 ‘국민자본’ 국민연금을 보자. 국민연금은 600조원의 투자재원을 갖고 있지만 이 중 70% 이상을 누구나 돈만 있으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채권과 주식 상품시장에 투자하고 있다. 매년 40조원에 가까운 신규 자금이 밀려들고 있지만 자기들만의 리그에 갇혀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다.

투자재원이 있는 곳과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자금을 필요로 하는 곳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을 하는 산업이 금융업이다. 그 간극이 크면 클수록 그 나라 금융산업은 낙후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에 사례로 든 회사가 100억원을 들고 해외시장에 도전장을 던졌을 때, 국민연금이 100억원을 함께 투자해 세계 시장을 향해 나아갔더라면 이 회사는 지금쯤 세계 1위 지하철 안전문 제조회사가 돼 있을지 모른다.

금융영역에서 이런 대규모 자본투자를 할 수 있는 분야는 사모펀드(PEF)다. 호주처럼 자원이 많은 나라는 자원에 투자하는 PEF가 왕성하다. 민간 의료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에는 의료산업에 투자하는 PEF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한국 기업의 성장과 해외진출에 동반할 PEF이다. 그러나 국내 PEF는 생산적인 성장과정에 동반하는 자금보다는 인수합병(M&A)이나 바이아웃(기업인수)에 주력하는 펀드가 대부분이다.

우리 기업들과 더불어 해외진출에 나설 실력 있는 투자자들이 금융산업에 존재해야만 한국 경제가 산다. 한국 경제의 미래와 운명을 함께하는 국민연금과 같은 펀드는 세계시장에 나아가 성장하고자 하는 국내 기업, 산업과 직접 부딪쳐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한국 경제 성장과 더불어 증식시켜야 할 600조원의 돈이 있다고.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향한 담대한 뜻을 세우는 데 국민연금이 동반자가 되겠노라고.

노금선 < 이오스파트너즈 대표·전 국민연금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