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그대의 생각에 약간의 광기를 섞으라. 알맞게 헛소리를 함은 즐겁도다’라는 로마시대 서정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향한 ‘약간의 광기’와 ‘헛소리’는 참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광기와 헛소리를 대신 표현해 주는 광대란 존재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광대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매료되고 박수를 보내며 일종의 대리만족을 얻는다. 그런데 광대도 사람이다. 광대에게도 스트레스를 날려줄 광대가 필요하다.

리골레토·카니오의 '광대 스트레스'
지난 12일 개막한 제15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광대가 주인공인 오페라 두 편을 선보인다. 개막작으로 공연을 마친 베르디의 ‘리골레토’와 오는 31일과 11월1일 공연되는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다. 국립오페라단도 19~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리골레토’를 공연한다.

‘리골레토’의 꼽추 광대 리골레토에게는 홀로 키운 외동딸 질다가 있다. ‘팔리아치’의 유랑극단 광대 카니오에겐 같은 극단의 배우이자 애인인 넷다가 있다. 리골레토는 아버지로서 질다에게, 카니오는 애인으로서 넷다에게 각자가 그리는 사랑의 이상적인 모습을 투영한다. 그런데 질다는 바람둥이 공작에게 희롱당하고, 넷다는 젊은 애인과 놀아난다.

리골레토는 살인청부업자 스파라푸칠레에게 공작을 죽여 자루에 담아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루에서 공작을 흠모해 대신 죽은 질다를 발견한다. 카니오는 넷다와 함께 연극 무대에 선다. 넷다는 극 중에서 현실과 똑같이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 분노와 질투로 이성을 잃은 카니오는 현실과 무대를 혼동하고 넷다를 죽인다. 관객들은 극과 현실이 뒤범벅된 무대를 보며 연기를 잘한다며 감탄할 뿐이다.

광대는 웃음을 주는 존재로 희극을 완성시킨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은 당연히 희극이어야 한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극에 등장하는 광대는 관객을 웃기지 않는다. 무대 뒤에서 그들이 인간으로서 받는 스트레스와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두 작품을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이처럼 웃음을 주지 않는 광대는 처음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두 작품을 볼 때마다 두 주인공은 웃음을 잃은 현대인의 모습과 닳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광대의 스트레스’라는 말도 떠오른다. 리골레토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줘야 하지만 정작 자신은 웃음이 없는 삶을 산다. 현실에서 풀 수 없는 분노를 꿈의 공간에서 푸는 카니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웃음의 상징과도 같은 광대가 등장하지만 보는 이를 씁쓸하게 하는 두 작품이 현대에도 꾸준히 무대에 오르며 감동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송현민 < 음악칼럼니스트 bstsong@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