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별세한 김운용 전 부위원장. / 사진=김운용 전 부위원장 블로그.
3일 별세한 김운용 전 부위원장. / 사진=김운용 전 부위원장 블로그.
개천절인 3일 소천한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수석부위원장(사진)은 ‘거목’이라는 표현 외에 적합한 수식어를 찾기 힘들 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국내는 물론 국제 스포츠계에서도 손꼽히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향년 86세. 노환으로 타계했다. 전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가 이날 오전 2시 21분 별세했다고 고인 측이 알렸다.

대구 출생인 김 전 부위원장은 당초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961년 외무장관 비서관을 시작으로 주미·주영대사관 참사관, 제20차 UN 총회 한국대표 등을 지냈다. 외교관은 어릴 적 그의 꿈이기도 했다.

고인의 삶은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이 되면서 궤적이 달라졌다. 고인은 생전에 회고록 격으로 펴낸 저서 〈세계를 향한 도전〉(2002)에서 이때를 생각지도 못했던 체육행정가의 첫 발을 내딛은 시점으로 설명했다. 이듬해 국기원을 설립했고 다시 1년 뒤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면서 총재를 맡았다.

1986년 IOC 위원에 선출되면서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했다. 외교관 경험을 살려 각종 스포츠 외교에 앞장섰고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 등 굵직한 국제 대회 유치 성과를 거뒀다.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IOC 집행위원 및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88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의 주역이라는 점은 고인 스스로 자긍심을 느끼는 대목이었다. 고인이 주도한 시드니올림픽 개·폐회식 남북 동시 입장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국제경기단체총연합회(GAISF) 회장, IOC 라디오·TV분과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며 저변을 다진 그는 2001년 유색인종 최초로 ‘세계 스포츠 대통령’으로 불리는 IOC 위원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비록 위원장에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한국 스포츠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끌어올렸다.

이처럼 화려한 스포츠계 경력을 토대로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기도 했다.

‘빛’ 뒤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장기 독주에 부정적 평가가 뒤따랐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유치를 둘러싼 ‘솔트레이크시티 뇌물 스캔들’에 휘말려 대한체육회장 자리를 내놓았다.

세계태권도연맹 후원금 유용 등 업무상 횡령,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른 게 치명타가 됐다. 이 때문에 IOC 위원직 제명 위기에 몰린 끝에 2005년 위원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국내 체육 발전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김 전 부위원장은 홈페이지 ‘김운용닷컴’을 개설하면서 그 배경으로 “수많은 선배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성공도 실패도 한 풍부한 체험은 더없이 소중한 성공 비결”이라며 “태권도와 한국 스포츠, IOC와 올림픽운동을 위해 반평생을 산 저의 다양한 경험과 도전정신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작년 말 올림픽운동 증진, 한국스포츠 발전과 스포츠외교 강화, 태권도 육성과 세계화 등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사단법인 김운용스포츠위원회를 설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대한체육회가 올 11월 발간할 예정인 스포츠영웅 김운용 편 구술 작업을 체육언론인회와 함께 진행해왔다. 지난달 27일 열린 진천선수촌 개촌식 참석이 마지막 공식 석상이 됐다.

고인의 빈소는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될 예정이며 유족으로 부인 박동숙 여사와 아들 정훈, 딸 혜원·혜정 씨가 있다.

한경닷컴 뉴스룸 o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