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가상화폐 미끼에 유사수신 결합…진화하는 '불법 다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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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해지는 불법 다단계
가짜 비트코인·게임기 투자 등 뜨는 아이템 내세워 가입 유혹
취업 미끼로 대학생들에 강매…만남앱 악용한 사기도 잇따라
신종수법 기승…단속 어려워
유사수신·불법 대부업·다단계…감시·감독 주체 달라 수사 난항
불법 알고 또다른 피해자 모집…조직구성 복잡해 추적도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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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가 가상화폐 ‘OO페이’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금은 페이당 30~50원이지만 조만간 200원으로 오를 겁니다.”
주부 A씨(67)는 지난해 지인의 소개를 받아 서울 대방동의 한 빌딩에서 열린 사업 설명회에 참석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자체 개발한 한방 비누를 중국의 유명 인터넷쇼핑몰에 납품 중인데 이곳에서 통용될 가상화폐를 개발한 것”이라며 “지금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자신했다. 지인의 적극적인 권유에다 그럴듯한 설명에 속아 넘어간 그는 선뜻 130만원을 내놨다. 그러나 얼마 안가 A씨는 돈을 고스란히 날리고 말았다. 이 회사는 중국 쇼핑몰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OO페이 역시 가짜였다. 역시 투자금을 사기당한 A씨 지인도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면 수익금을 나눠주겠다”는 말에 속아 불법 다단계 영업에 동참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부천소사경찰서는 지난 6월 OO페이를 앞세워 노인 1100여 명으로부터 16억원 상당을 가로챈 일당 7명을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및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들은 가상화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노인들을 상대로 범행을 계획했다”며 “대표·총괄본부장 등으로 역할을 나눈 뒤 지인을 모집하면 수익금을 나눠주는 불법 다단계 영업 방식을 썼다”고 말했다.
◆‘트렌드세터’가 된 불법 다단계
22일 경찰청에 따르면 올 1~8월 불법 다단계 검거 건수는 126건, 검거 인원은 948명에 달한다. 검거 건수는 2014년 95건에서 지난해 156건으로 64%가량 늘었다. 과거 불법 다단계 영업은 ‘옥장판’으로 대표되는 의료기기나 건강보조식품 등이 주된 미끼로 쓰였다. 피해액이 4조원대로 단군 이래 최대 다단계 사기극으로 불리는 ‘조희팔 사건’도 의료기기 렌털이라는 평범한 수법을 썼다.
그러나 최근 불법 다단계 업체들은 가짜 가상화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광고권, 상조회사 가입, 해외 게임기 투자 등 이른바 ‘핫한 아이템’을 내세우며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는 모습이다. 법망을 피하기 위해 해외 법인을 차리거나 스마트폰 만남앱(응용프로그램)을 악용하는 사례까지 나타나고 있다.
수원지방법원은 이달 초 무허가 다단계 판매조직을 운영하면서 말레이시아 SNS ‘엠페이스’ 광고권을 미끼로 투자금 600여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기소된 유모씨(47)와 김모씨(48)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 “방문판매법 적용 범위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에 한정되므로, 말레이시아 법인을 세우고 말레이시아 내 인적·물적 시설을 뒀던 피고인들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재판부는 “국내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으며, 다단계 판매조직이 국내에서 관리·운영돼 법 적용 대상에 해당한다”고 일축했다
스마트폰 만남앱을 이용해 이성에게 접근해 호감을 산 뒤 다단계 업체로 유인하기도 한다. 서울시가 지난해 2월부터 올해 6월까지 접수된 특수판매 분야에 대한 민원 277건을 분석한 결과 불법 다단계 피해와 관련한 문의가 135건(48.7%)으로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이 중에는 스마트폰 만남앱에서 알게 된 여성이 “중견기업 사무직 자리가 있다”고 소개한 업체를 찾았다가 1400만원 대출을 강요받은 사례도 있었다.
◆취업 미끼로 취준생에게 물건 강매
20대를 대상으로 한 불법 다단계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지난 5월 취업난에 시달리는 20대 초중반의 대학생, 취업준비생 등을 상대로 취업을 시켜주겠다며 유인해 합숙을 강요하고 대출을 받아 물건을 사도록 강매한 38명을 검거해 이 중 2명을 구속했다. 피해자는 209명, 피해금액은 14억여원에 달했다. 피의자 중 일부는 2011년 송파구 거여·마천동 일대에서 대학생을 상대로 불법 다단계를 한 이른바 ‘거마 다단계’의 상위 간부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대학생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초반 젊은이들을 노렸다. SNS로 피해자들에게 접근해 쇼핑몰 등 일자리를 소개해줄 테니 일단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라는 식으로 꼬드겼다. 대출을 받아 물건을 사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물건을 판매하려면 직접 써봐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피해자들에게 화장품과 건강기능식품 등을 구매하도록 하고 돈이 없다고 하면 제2금융권에서 대출받을 것을 강요했다. 1500만원을 대출받으면 이 중 1000만원으로 물건을 사도록 했고, 200만원은 5개월치 합숙비 명목으로 뜯어냈다.
◆투자금 고갈 전엔 적발·검거도 어려워
관계당국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직접판매공제조합, 한국특수판매조합, 경찰은 분기에 한 번씩 하던 합동회의를 지난해부터 두 달에 한 번으로 늘렸다. 공정위는 방문판매법에 따라 다단계 업체들을 관리·감독하고 불법 업체에 대해서는 수사를 의뢰한다. 서울시도 2015년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최초로 특사경 수사권을 대부업뿐 아니라 다단계까지 확대했다.
유사 수신과 다단계가 결합한 신종 범죄가 늘어나면서 단속에 어려움도 커졌다. 경찰 관계자는 “최대한 많은 투자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다단계와 유사 수신을 결합한 범죄가 늘고 있다”며 “유사 수신은 금융감독원, 다단계는 공정위가 모니터링하고 있어 감시망의 사각지대가 생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특사경도 유사 수신에 대한 수사권은 없다.
다단계 특성상 신속한 적발과 검거가 쉽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불법 다단계 업체들은 대개 폰지사기, 즉 ‘돌려막기’ 수법을 사용한다. 신규 가입자에게 거액의 가입비를 걷어 이를 기존 투자자에게 나눠주며 시간을 버는 방식이다. 경찰 관계자는 “돈이 완전히 바닥나서 수익금 배분이 중단되기 전까지 정상적 투자·판매가 이뤄지고 있다고 믿었던 피해자가 많다”며 “신규 투자자의 가입비를 기존 회원들이 나눠 갖는 구조이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도 피해자가 또 새로운 피해자를 끌어들이는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피라미드형으로 뻗어나간 조직 전체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한계도 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주부 A씨(67)는 지난해 지인의 소개를 받아 서울 대방동의 한 빌딩에서 열린 사업 설명회에 참석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자체 개발한 한방 비누를 중국의 유명 인터넷쇼핑몰에 납품 중인데 이곳에서 통용될 가상화폐를 개발한 것”이라며 “지금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자신했다. 지인의 적극적인 권유에다 그럴듯한 설명에 속아 넘어간 그는 선뜻 130만원을 내놨다. 그러나 얼마 안가 A씨는 돈을 고스란히 날리고 말았다. 이 회사는 중국 쇼핑몰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OO페이 역시 가짜였다. 역시 투자금을 사기당한 A씨 지인도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면 수익금을 나눠주겠다”는 말에 속아 불법 다단계 영업에 동참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부천소사경찰서는 지난 6월 OO페이를 앞세워 노인 1100여 명으로부터 16억원 상당을 가로챈 일당 7명을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및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들은 가상화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노인들을 상대로 범행을 계획했다”며 “대표·총괄본부장 등으로 역할을 나눈 뒤 지인을 모집하면 수익금을 나눠주는 불법 다단계 영업 방식을 썼다”고 말했다.
◆‘트렌드세터’가 된 불법 다단계
22일 경찰청에 따르면 올 1~8월 불법 다단계 검거 건수는 126건, 검거 인원은 948명에 달한다. 검거 건수는 2014년 95건에서 지난해 156건으로 64%가량 늘었다. 과거 불법 다단계 영업은 ‘옥장판’으로 대표되는 의료기기나 건강보조식품 등이 주된 미끼로 쓰였다. 피해액이 4조원대로 단군 이래 최대 다단계 사기극으로 불리는 ‘조희팔 사건’도 의료기기 렌털이라는 평범한 수법을 썼다.
그러나 최근 불법 다단계 업체들은 가짜 가상화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광고권, 상조회사 가입, 해외 게임기 투자 등 이른바 ‘핫한 아이템’을 내세우며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는 모습이다. 법망을 피하기 위해 해외 법인을 차리거나 스마트폰 만남앱(응용프로그램)을 악용하는 사례까지 나타나고 있다.
수원지방법원은 이달 초 무허가 다단계 판매조직을 운영하면서 말레이시아 SNS ‘엠페이스’ 광고권을 미끼로 투자금 600여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기소된 유모씨(47)와 김모씨(48)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 “방문판매법 적용 범위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에 한정되므로, 말레이시아 법인을 세우고 말레이시아 내 인적·물적 시설을 뒀던 피고인들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재판부는 “국내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으며, 다단계 판매조직이 국내에서 관리·운영돼 법 적용 대상에 해당한다”고 일축했다
스마트폰 만남앱을 이용해 이성에게 접근해 호감을 산 뒤 다단계 업체로 유인하기도 한다. 서울시가 지난해 2월부터 올해 6월까지 접수된 특수판매 분야에 대한 민원 277건을 분석한 결과 불법 다단계 피해와 관련한 문의가 135건(48.7%)으로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이 중에는 스마트폰 만남앱에서 알게 된 여성이 “중견기업 사무직 자리가 있다”고 소개한 업체를 찾았다가 1400만원 대출을 강요받은 사례도 있었다.
◆취업 미끼로 취준생에게 물건 강매
20대를 대상으로 한 불법 다단계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지난 5월 취업난에 시달리는 20대 초중반의 대학생, 취업준비생 등을 상대로 취업을 시켜주겠다며 유인해 합숙을 강요하고 대출을 받아 물건을 사도록 강매한 38명을 검거해 이 중 2명을 구속했다. 피해자는 209명, 피해금액은 14억여원에 달했다. 피의자 중 일부는 2011년 송파구 거여·마천동 일대에서 대학생을 상대로 불법 다단계를 한 이른바 ‘거마 다단계’의 상위 간부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대학생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초반 젊은이들을 노렸다. SNS로 피해자들에게 접근해 쇼핑몰 등 일자리를 소개해줄 테니 일단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라는 식으로 꼬드겼다. 대출을 받아 물건을 사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물건을 판매하려면 직접 써봐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피해자들에게 화장품과 건강기능식품 등을 구매하도록 하고 돈이 없다고 하면 제2금융권에서 대출받을 것을 강요했다. 1500만원을 대출받으면 이 중 1000만원으로 물건을 사도록 했고, 200만원은 5개월치 합숙비 명목으로 뜯어냈다.
◆투자금 고갈 전엔 적발·검거도 어려워
관계당국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직접판매공제조합, 한국특수판매조합, 경찰은 분기에 한 번씩 하던 합동회의를 지난해부터 두 달에 한 번으로 늘렸다. 공정위는 방문판매법에 따라 다단계 업체들을 관리·감독하고 불법 업체에 대해서는 수사를 의뢰한다. 서울시도 2015년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최초로 특사경 수사권을 대부업뿐 아니라 다단계까지 확대했다.
유사 수신과 다단계가 결합한 신종 범죄가 늘어나면서 단속에 어려움도 커졌다. 경찰 관계자는 “최대한 많은 투자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다단계와 유사 수신을 결합한 범죄가 늘고 있다”며 “유사 수신은 금융감독원, 다단계는 공정위가 모니터링하고 있어 감시망의 사각지대가 생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특사경도 유사 수신에 대한 수사권은 없다.
다단계 특성상 신속한 적발과 검거가 쉽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불법 다단계 업체들은 대개 폰지사기, 즉 ‘돌려막기’ 수법을 사용한다. 신규 가입자에게 거액의 가입비를 걷어 이를 기존 투자자에게 나눠주며 시간을 버는 방식이다. 경찰 관계자는 “돈이 완전히 바닥나서 수익금 배분이 중단되기 전까지 정상적 투자·판매가 이뤄지고 있다고 믿었던 피해자가 많다”며 “신규 투자자의 가입비를 기존 회원들이 나눠 갖는 구조이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도 피해자가 또 새로운 피해자를 끌어들이는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피라미드형으로 뻗어나간 조직 전체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한계도 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