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기업을 선악·갑을로 재단
'내 편'의 적폐도 고쳐야 진짜 개혁"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누가 뭐래도 문재인 정부는 가슴이 따뜻한 정부다. 대통령이 비정규직 근로자의 손을 잡고, 광주 희생자 유가족을 꼭 안아준 모습에 국민들은 마음이 짠했다. 야당들조차 ‘쇼통’이라면서도 대통령의 공감 능력만큼은 한 수 접어준다. 지지율 고공행진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에 비례해 ‘적폐 청산’의 의욕이 과잉이다. 지난 넉 달은 ‘전선(戰線)’을 전방위로 넓힌 총력전이었다. 정치·사회적으로 탈원전과 사법 개혁, 과거사 재규명, 건강보험 보장범위 확대 등을 밀어붙였다. 경제에서도 ‘비정규직 제로화’ 추진, 최저임금 인상, 초(超)고소득층 증세,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 178조원 복지 확대 등을 펼쳐놨다. 하나같이 ‘뜨거운 가슴’과 ‘분노’가 동력이다. 소위 촛불정신인 셈이다.
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 분노’ 한다고 해서 먹고사는 현실 문제가 해소되는 건 아니다. 당장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화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노·노(勞·勞) 갈등’, 기간제 교사의 ‘희망고문’ 반발,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인들의 호소가 쏟아지고 있다. ‘파이’를 키우지 않고 다수를 만족시킬 해법은 없다. 병인(病因)에 대한 진단이 정확해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오는 법이다. 왜 비정규직이 생기고, 청년실업이 이 지경이고, 집값이 안 잡히고, 골목상권이 안 살아나는지…. 이게 다 시장의 ‘땡깡’과 기업의 ‘적폐 연대’ 탓일까.
정부가 조바심을 낼수록 ‘현실의 벽’은 더 높게 다가올 것이다. 역대 정권이 그랬듯이 ‘개혁 피로 증후군’도 시간문제다. 문제는 정부 핵심 실세들이 가슴만큼 머리까지 뜨겁다는 데 있다. 도덕적 우월감으로 세상을 가르치고 손보겠다는 의욕이 앞선다. 고위 공직자 다수가 다주택자임에도 “살 집 아닌 집들은 파시라”, “집 갖고 장난치지 말라”는 말도 서슴없이 한다. 치열한 시장에서 부가가치를 생산해보지 않은 이들이 대개 평론가 기질을 발휘한다.
앨프레드 마셜의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은 모든 정책입안자에 해당되는 경구다. 문제의식은 뜨거운 심장으로 품되, 해법은 냉철한 이성으로 찾으란 얘기다. 하지만 좌파적 경제관념은 세상을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재단한다. 정의를 독점하는 규범적 사고에 갇혀, 머리까지 뜨겁게 만든다. 정책의 명암·득실·파장에 대한 실사구시 분석보다 당장의 효과가 중시된다. 세상에 성공한 좌파 정부는 있어도, 좌파 경제정책으로 성공한 정부는 없는 이유다.
‘민주정부 3기’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는 DJ·노무현 10년이라는 더할 나위 없는 교재가 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조언은 구체적이다. “개혁은 뜨뜻미지근할수록 좋다. 은근히 스며들었다가 나중에 보다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성공확률이 높다, 전선은 함부로 넓히지 말아야 한다.”(《경제는 정치다》)
DJ 때 4대 개혁도 미완이었는데 문재인 정부는 전선이 너무 넓다. 게다가 경제현상을 선악, 갑을, 노사, 착취 등 대립적으로 본다. 시장과 인간행동을 의도대로 끌어갈 수 있다는 지적 오만까지 엿보인다. 일본 아베노믹스는 기업에 임금 인상을 종용하는 동시에 가려운 곳(규제철폐, 법인세·전기료 인하 등)을 긁어줬다. 그 결과가 청년일자리 천국이다. 배울 건 배우자.
한국은 더 이상 실패할 여유가 없는 나라다. 저출산·고령화, 4차 산업혁명, 중국의 추격 등 한순간도 지체할 틈이 없다. 철저한 구조개혁, 노동개혁, 규제혁신 없이 진통제만으론 풀 수 없는 문제다. 진정한 개혁은 ‘내 편의 적폐’까지 인정하고 고치는 것이다. 경제만이라도 이념을 걷어내고 ‘차가운 머리’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간디는 “방향이 맞지 않으면 속도는 무의미하다”고 했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