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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규재 칼럼] 남미행 열차에 핵폭탄까지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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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 원전 호들갑 떨면서 북핵엔 무감각
    '사드 반대·미군 철수' 시위대 여전히 활보
    '노예의 평화'가 한국형 이념 돼선 곤란
    핵 인질 안되려면 영혼 다 걸고 투쟁해야

    정규재 논설고문 jkj@hankyung.com
    [정규재 칼럼] 남미행 열차에 핵폭탄까지 싣고
    대화라는 허구의 단어에 집착하던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이 6차에 이르러서야 “참으로 실망스럽다. 분노한다. 응징하겠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어, 갑자기 웬일이지?’라는 생각도 잠시였다. “수소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레드라인까지는 남아 있다”는 주장이 청와대 내에서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러면 그렇지’ 하게 된다. 논리와 그것에 내재한 질서가 더는 교정이 불가능한 뒤죽박죽에 이르렀다. 국민들로서는 《1984》의 윈스턴 스미스처럼 복종 혹은 적응의 과정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인지부조화 이론은 복종이라는 결과의 법칙성을 포함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6·15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의 대가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김정일이 이 소식을 듣고, 정상회담은 둘이서 했는데 노벨상은 왜 혼자 받느냐고 화를 냈다는 우스개도 있다. ‘김정일 노벨상’이라면 소극(笑劇)이 되고 만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웅변을 토했다. 한반도 상공에 미사일 포연이 자욱하고 수십 개 핵폭탄이 도열한 지금 그는 더는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발언과 그것에 기초한 정책들은 우리 속에 사이비 평화라는 독버섯을 퍼뜨렸다. 저쪽의 핵폭탄에 무감한 사람일수록 이쪽 원전의 위험성에 몸서리를 친다는 경향성도 관찰된다. 한 나라의 권력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당혹스럽다. 집단적 거짓말이거나 최면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한국 이데올로기’다.

    사드 배치 반대! 미군 철수! 등의 구호들이 성주 톨게이트에서부터 시내까지 빨간색 깃발의 장엄한 도열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핵미사일이 날아다니는 21세기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실로 부조리 상황극이다. 나치 수용소를 제외하고는 이 정도의 집단 인지부조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돈 더 주겠다! 복지 더 달라!는 것과 핵폭탄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주인이 아닌 자는 전쟁에도 곳간 사정에도 관심이 없다. 노예들에게 전쟁이란 다른 주인으로의 교체를 의미할 뿐이다. 그들은 종이에 휘갈겨 쓴 푼돈의 청구서에도 쉽게 몸을 판다. 그것은 노예들의 도덕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왜 우리가 북한의 핵 개발을 막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결코 반어법이 아니었다. ‘우리가 중국과 미국 핵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지 않는데, 왜 북한에 대해서는 그래야 하는가’라는 노무현식 반어법이 오늘의 부조리극을 낳았다. 인질이 납치범에 동화되는 전형적인 스톡홀름 증후군이었다. 한 배를 탔다는 오도된 감정에 사로잡히면 종종 한 배를 타게 된 적에게서 동지애를 느끼는 전도된 감정을 갖게 된다.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허약하고 자기가 만들어 낸 환상에 도취한다. 그는 중국의 폭력적 대중운동(문화혁명)을 진성 민주주의라고 생각한 이영희류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베트남의 적화 통일에 환희를 느꼈고, 그 문제 많던 10·4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성과를 듣고 만세삼창이라도 부르고 싶었다는 것은 문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의 한 구절이다. 이는 앞뒤를 잘라낸 악의적 편집이 절대 아니다.

    ‘복종이라도 전쟁의 부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치열한 영혼의 투쟁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만일 평화를 돈 주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노예에 속한 자다. 임박한 왜란을 앞두고도 조선의 지배계급은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라고 현실 부정의 단말마적 절규를 되풀이했다. ‘아큐’들이었다. 그런 ‘정신의 승리(?)’가 뿌리 내린 것은 오랜 주자학적, 문민적 세계관 덕분이었다. 그렇게 한국인들은 스스로 핵 인질이 돼 갔다.

    ‘남한 전용 핵폭탄’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는 북한에 대해 대책이 없다는 절망의 단어들만 한숨처럼 쌓고 있다. 그러나 왜 없겠는가. 재래식 전력으로도 몇십 배의 보복을 안길 수 있다. 영혼 전부를 걸어야 자유도 평화도 얻을 수 있다. 남미행 특급열차에 핵폭탄까지 실려 있다는 상황이다. 총체적 위기다.

    정규재 논설고문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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