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서울대 폐지론'은 살아 있다
사와 다카미쓰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국립대 법인화가 거론될 당시 ‘국립대 법인화=소비에트화’ 위험을 경고한 적이 있다. 자칫하면 법인화 국립대의 목표·계획을 지시하는 정부 평가위원회는 구(舊)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대학 법인은 공장이 될 수 있다는 비유였다. 관치(官治)를 벗어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는 속았다.” 2011년 서울대가 법인화된 이후 교수들이 하는 말이다. 교육부가 매년 운용성과 평가를 하고, 여차하면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하는 기획재정부까지 끼어들 태세다. 법인화로 기대했던 자율성은 없고 정부 개입은 그대로라는 항변도 이어진다. 예산의 독립성은 더 멀어지고 감사원, 국회의 집중 타깃이 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공감이 간다.

그러나 정체 모를 법인화를 오로지 관치 탓으로 돌리려면 서울대 스스로 물어야 할 게 있다. 그동안 서울대는 어떤 자기혁신을 했느냐는 것이다. 그나마 부여된 인사·재정·운영상의 권한이라도 행사해 적극적으로 변화를 꾀했던가. 유감스럽게 그런 증거 또한 찾기 어렵다.

법인화 6년 만에 공무원식 호봉제 대신 도입하겠다던 성과연봉제가 흐지부지된 것만 해도 그렇다. 호봉제와 정년보장이란 공무원 틀을 고수하겠다면 경쟁력 운운해 가며 법인화를 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서울대가 모범사례라 했던 싱가포르국립대(NUS)가 2006년 법인화 시행 직후 호봉제를 성과급제로, 정년보장을 성과 연동으로 바꾼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에 시흥캠퍼스 갈등 사태, 리더십을 상실한 총장,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사회 등을 보면 과연 법인 대학의 모습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정치권에서는 틈만 나면 서울대와 지방 거점 국립대를 묶어 공동 선발·운영·학위로 가자는 ‘국립대 통합론’, 이른바 ‘서울대 폐지론’을 흘린다. 성낙인 서울대 총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대학을 13개로 쪼갠 프랑스에도 그랑제콜이라는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서울대를 하향평준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지금 상황에서 성 총장의 이 말이 밖에서 얼마나 공감을 얻을까.

2004년 노무현 정부에서 처음 서울대 폐지론이 나왔을 때와 지금은 판이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울대 폐지론에 반대했다(김병준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의 전언)지만, 문재인 대통령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대선 공약에서 빠졌다고 안심하기엔 이르다.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취임사는 이 정부가 ‘서열화’ ‘경쟁’ ‘불평등’을 같은 짝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값 등록금, 블라인드 면접, 국립대 통합론 등의 흐름이 결국 ‘대학 평준화’에서 합류할 것이라는 시그널이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머지않았다. 지방분권·국가균형발전을 완성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래서 선거 지형이나 여론상 유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정치권이 택할 카드는 뻔하다. 국정과제에서 불씨를 살려놓은 ‘지자체 연계 강화를 통한 거점 국립대 집중 육성’이 ‘국립대 통합론’으로 활활 타오를 수 있다.

밖에서는 온통 디지털 전환이 어떻고, 교육혁명이 어떻고 하는 얘기들뿐이다. 차별화, 다양화 등 생존할 길을 모색하는 대학 혁신이 눈부시다. 한국만 딴 세상으로 가게 생겼다. 4차 산업혁명, 학령인구 감소보다 당장 서열화를 없애라는 정치 공세를 더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이대로 가면 정부는 서울대에 두 가지 선택지를 던질지도 모른다. 법인화를 유지해 통합 국립대와 따로 가든가, 아니면 법인화를 폐지해 통합 국립대에 합류하든가. 전자는 관치의 혹독함 속에 홀로서기를 해 보라는 협박일 테고, 후자는 대학 평준화 플랫폼이 돼 달라는 주문일 것이다. 서울대는 뭘 택할 건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기득권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대학개혁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자기혁신의 방아쇠를 당겨야 하지 않겠나.

안현실 논설·전문위원·경영과학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