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골프대디
며칠 전 우연히 박세리 프로가 1998년 US오픈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다시 보게 됐다. 우승이 확정되자 웬 남성이 그린 위로 냅다 뛰어가 박 프로를 번쩍 들어올렸다. 아버지 박준철 씨였다. 한국형 골프대디의 출현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박준철 씨는 지금의 박 프로를 만든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골프채를 쥐어 주고 스윙을 가르쳐 준 것도 그였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딸의 담력을 키우기 위해 한밤중에 공동묘지로 데려갔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그를 둘러싸고는 숱한 소문과 이야기가 돌았다. 뒷담화가 늘 그렇듯이 좋은 말보다는 나쁜 얘기가 더 많았다. 갈등도 없지 않았겠지만 박세리 선수는 그래도 늘 아버지를 믿고 존중했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뽐내던 시절에도 성적이 안 좋을 때면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아버지”라며 종종 스윙 점검을 받았다. 그러고 나선 거짓말처럼 컨디션을 회복한 적도 많다.

골프 선수, 특히 여자 선수와 아버지의 관계는 한마디로 애증 관계다. 대체로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처음 골프를 접하게 되는 만큼 아버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특히 어린 나이에 프로가 되면 아버지가 매니저 겸 운전기사, 스윙코치는 기본이고 생업을 포기하고 캐디까지 맡는 경우도 있다. 매사에 간섭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딸로서는 아버지의 희생이 고맙지만 어느 순간 답답하고 짜증이 나기도 한다. 늘 어린애 취급만 하고 골프 전문가도 아니면서 스윙에 왈가왈부하게 되면 싸움으로 번진다. 딸과 다투고 캐디를 그만두는 사례가 적잖은 것도 그래서다.

골프대디를 둘러싼 뒷말은 골프장 밖에서도 종종 새어 나온다. 가장 흔한 유형은 유명 골퍼의 아버지가 “내가 누군지 알아?” 하며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다 구설에 오르는 케이스다. 세금 체납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 유소연 선수 아버지 역시 이와 비슷한 심리 상태에서 한순간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 것 아닌가 싶다.

가슴 뭉클한 골프대디 스토리도 많다. 미국 LPGA에서 뛰는 최운정 선수 아버지는 첫 승 후 캐디를 그만뒀지만 최근 다시 딸의 백을 메고 있다. 최 선수가 골프를 즐기지 못하는 것 같다며 심리적 안정을 돕기 위해 필드로 돌아온 것이다. KLPGA 김예진 프로는 퍼팅 때 캐디인 아버지가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 줬다가 2벌타를 받고 첫 승을 날릴 뻔했다. 결국 우승을 일궈낸 그는 “아버지가 미안해할까 봐 더 열심히 쳤다”고 말해 잔잔한 감동을 줬다.

골프대디의 ‘바지 바람’에는 양면성이 있다. 때론 ‘갑질’로 욕을 먹기도 하지만 희끗희끗한 머리를 날리며 무거운 골프백을 멘 모습에서는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유별난 자식사랑의 또 다른 단면이 아닐까.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