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흠모하던 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대여, 당신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나는 항상 그대와 함께 있습니다”라고 사랑스러운 사기를 쳤다. 당시에는 항상 그대와 함께 있다는 말이 아주 달콤한 애정표현이었겠지만 오늘날 연인에게는 별로 감흥 없이 들릴지도 모른다. 이제는 ‘항상 그대와 연결돼 있음’이 현실화한 때문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좋은 사람은 곁에 두고 항상 연결돼 있고자 했고 반대로 미운 사람이나 죄인은 유배를 보내 격리된 생활을 하도록 징벌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격리기간에 진정한 자아를 찾은 사람이 제법 있다. 작가나 예술가들이 주로 그랬다. 걸작은 그들이 외로움을 이겨내고 절대고독의 경지에 이른 상태에서 탄생하곤 했다. 추사체로 잘 알려진 김정희가 한 예가 아닐까.

추사는 유복한 명문가에서 자라 좋은 교육을 받았고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관운을 타고 거침없이 상승했다. 그러다가 당쟁과 당파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가고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고 만다. 홀로 살던 시절에 그린 ‘세한도(歲寒圖)’에는 제자이자 오랜 벗인 이상적에게 귀한 책을 어렵사리 구해 보내준 것에 대한 깊은 감사의 글과 더불어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 그림을 곁들였다. 정보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추사에게 이상적이 보내준 책은 목마름을 해소시킬 오아시스와도 같은 선물이었으리라.

‘세한도’ 그림은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초라한 집 한 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풍경을 보여준다. 여기에 그려진 나무들은 올곧고 꿋꿋하기는 해도 과시나 오만함은 찾기 어렵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초라함과 상실감을 견디면서 홀로 버티는 추사의 모습인 것이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보낸 9년을 오직 학문과 서예 연구에 몰두해 마침내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만년의 추사체는 달관하듯 새롭게 강해진 그의 성숙한 모습이 담겨 있다는 평을 받는다.

술이 익는 과정에는 홀로 어두운 곳에 숨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시간이 있다. 인간의 숙성 역시 연결 속에서 나를 내보이는 중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으면서 기존의 나를 삭히고 묵히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사향을 지니면 그 향기가 절로 풍기니, 굳이 바람 앞에 서서 향기를 전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有麝自然香, 何必當風立).” 명심보감에 있는 글귀인데 스스로 풍요로워지는 ‘단독함’의 경지를 말해준다.

‘혼밥’과 ‘혼술’을 하는 ‘혼족’이 많다지만 버스를 기다릴 때도, 홀로 거리를 걸어갈 때도, 심지어 혼자 휴일근무를 하는 중에도 2017년의 인류는 결코 완연한 의미의 혼자는 아니다. 여러 재미있는 정보나 오락거리로부터 격리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혼족문화는 단독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기보다 차라리 웹 연결문화의 정수라고 해야 옳다. 혼자 있어도 바로 듣고 싶은 음악을 선택할 수 있고 바빠서 놓쳐버린 드라마를 볼 수도, 지인들과 교류하며 자기 생각을 피드백 받을 수도 있다. 정보의 빈약 속에 혼자서는 도무지 뭘 할지 몰라 당황하던 이전 세대의 젊은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보시대가 열린 것이다.

스마트폰은 과거 30여 년간 등장한 발전된 기술들을 엮어 우리에게 복합 혜택을 가져다주고 있다. 비록 스마트폰 좀비라는 별칭을 얻기는 했지만 대체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외롭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늘 연결 중이라 정말로 혼자 있으면서 스스로 깨닫는 시간을 누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가끔은 자신에게도 유배의 징벌을 내려서 인간 본연의 고독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20세기 말에 그룹 시카고(Chicago)가 ‘하드 투 세이 아임 소리(Hard to Say I’m Sorry)’라는 제목의 노래에서 불렀듯이, 누구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연인들에게조차 쉬는 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주은 < 건국대 교수·미술사 myjoolee@konku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