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현의 2003년작 ‘Black sun white sun’.
김보현의 2003년작 ‘Black sun white sun’.
“그때 뉴욕은 추상표현주의의 전성기였어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던 억압적 상황에서도 자유를 갈망하던 당시 추상표현주의는 저의 심리에 가장 적합한 화풍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습과 전통을 반대하는 폭발적인 감정의 표현. 이것이 바로 제가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가 김포(한국명 김보현·1917~2014)는 ‘잊혀진 거장’이다. 1946년 조선대 예술학과를 창립한 김포는 해방 전후 이념 대립 속에서 어떨 때는 좌익 혐의를, 또 다른 때는 우익 혐의를 받으며 양쪽에서 핍박당했다. 1955년 도망치듯 미국 일리노이대 교환교수로 떠난 그에게 당시 뉴욕을 휩쓸던 추상표현주의는 그의 내면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출구가 됐다.

도미 초기에는 뉴욕 소호의 넥타이 공장에서 넥타이 그림을 그리고 시간당 1달러 수당을 받으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한국에서의 옥살이와 고문의 기억 때문에 30여 년간 한국 사회와 연락을 끊었다. 이후 1995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회고전 등을 통해 한국에 다시 이름을 알렸다.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포 김, 덴 앤드 나우(PO KIM: Then and Now)’는 1세대 재미화가 김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70여 년에 걸친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회고전이다. 전시는 모두 7개 주제로 나뉜다. 화가를 소개하는 ‘김포의 여정’을 시작으로 ‘흔적’과 ‘추상’에서는 그의 예술적 뿌리인 추상 작품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1970년대 사실주의 회화로 구성된 ‘오브제와 콜라주’, 작가가 세계를 여행하며 느낀 감정을 담은 ‘알레고리’, 고통 없는 세계를 꿈꾸며 그린 ‘유토피아’ 등으로 이뤄져 있다.

2장 ‘흔적’에 전시된 뉴욕 정착 초기 작품인 ‘무제 1959-1965’에서는 당시 뉴욕에서 유행한 추상표현주의에 동양 서예기법을 접목한 김포만의 추상 표현기법을 엿볼 수 있다. 전시회를 공동 기획한 조영 왈드앤킴 미술재단 이사장은 “한국과 연락을 일절 끊었기 때문에 그의 예술적 평판이 국내에선 많지 않았지만 1950~1960년대 윌렘 드쿠닝 등 뉴욕의 메이저 화단 화가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아시아인 화가는 당시 김포 이외엔 없었다”고 설명했다.

김포는 1970년대부터 전통적인 정물화 기법을 이용한 극사실주의 회화로 전향했다. 그는 극사실주의적 그림의 대상으로 과일과 채소 같은 매일 쉽게 볼 수 있는 물체를 택했다. ‘브로콜리3’은 그림의 대상과 화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참선하는 자세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예술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뉴욕타임스에서 극찬한 작품이기도 하다.

화가는 1980년대부터 다양한 미술재료를 활용해 유토피아적 세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생전에 그는 “옛날에 나의 인생은 순조롭지 않았다. 고통을 잊고 오히려 환상적인 것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시는 오는 7월30일까지. 성인 8000원, 학생 6000원, 노인 4000원.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