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농공상' 상인 천대한 조선의 비극 떠올라
보호해준다는 중소기업의 한숨·비명 안들리나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상인이었던 임상옥의 인생도 그렇게 찌들어갔다. 철종 때 무역상이었던 그는 최초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서 인삼 무역권을 독점하는 수완을 발휘해 큰돈을 벌었다. 거대 상단(商團)을 꾸려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자립기반을 제공했다. 굶주리는 백성과 수재민을 구제하는 데도 거액을 쾌척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평안도 곽산군수 자리를 돈으로 사서 ‘한풀이’를 하고는 장사를 접었다.
정조 때 제주 거상(巨商)으로 유명했던 김만덕이 장사를 그만두게 된 사연은 더 기가 막힌다. 기근이 들자 육지에서 식량을 사들여 빈민들을 구제한 선행(善行)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정조가 그를 불렀다. 천한 상인신분으로는 입궐 할 수 없어 급조한 벼슬을 내렸다. 이후에는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게 됐다. 벼슬한 자가 ‘천한’ 장사를 해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바깥세상은 이미 맹렬한 속도로 산업화하고 있던 때였다. 정조의 선왕(先王)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는 야만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1762년, 영국 런던에서는 ING금융그룹의 전신(존앤드프란시스베어링기업)이 문을 열었다. 20세기로 넘어가면서 미국의 록펠러, 카네기, JP모간과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家)가 거대한 부(富)를 쌓던 무렵, 조선에도 이들 못지않은 ‘부호’가 있었다는 건 서글픈 아이러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니라 임금이었다.
말년의 조선 왕조는 사업 이권을 찾아 몰려든 열강의 기업가들에게 광산 채굴권, 철로 부설권 따위를 헐값에 팔아치우고, 그 돈을 고스란히 왕실 금고에 귀속시켰다. 헤이그 밀사를 고종의 하사금으로 보내고, 보성전문 등의 학교가 임금이 내려보낸 돈으로 설립된 건 그렇게 챙긴 막대한 자금력 덕분이었다. 기업가의 싹을 말려버린 조선은 그런 씁쓸한 풍경과 함께 시들어갔다.
문재인 정부 들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조선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핵심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업과 기업인들의 의견을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대책을 비판한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에게 “반성부터 하라”는 면박을 준 이후로는 주요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기업인들을 노골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대기업들만이 아니다. 중소기업계는 더 큰 충격을 호소하고 있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등 생존이 걸린 문제들이 제대로 된 의견수렴 없이 밀어붙여지고 있어서다. 최저임금을 3년 내에 지금보다 50% 이상 많은 1만원으로 올릴 경우 편의점주 등 소상공인들이 받을 타격, 지금도 구인난을 겪고 있는 중소·영세기업들이 근로시간을 급격하게 단축할 경우 공장 가동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하소연 등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일방적인 탈(脫)원전·석탄화력발전 정책도 이미 거액을 투자한 기업들에는 황당한 ‘날벼락’이다.
기업 현장을 외면한 정책 밀어붙이기가 ‘제왕적 조치’라는 비판까지 받기에 이르렀지만, 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공약인 ‘통신기본료 폐지’가 기업들에 큰 적자를 초래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미래창조과학부는 “특정 일방(기업)을 위한 자세만 보인다”는 경고를 받고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됐다.
역사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고서도, 기업인을 낮춰 보고 계도 대상으로 여기는 주자학적 정치는 갈수록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국에서 기업하는 것은 전생의 업보(業報) 때문”이라는 기업인들의 자조(自嘲)를 언제까지 농담으로 들어 넘길 건가. 21세기의 임상옥과 김만덕이 쏟아져 나오지나 않을지, 두렵다.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