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관광지 기념품 가게에서 말린 고추를 실에 꿰어 팔고 있다. 헝가리는 파프리카의 원산지다.  사계절 제공
헝가리의 관광지 기념품 가게에서 말린 고추를 실에 꿰어 팔고 있다. 헝가리는 파프리카의 원산지다. 사계절 제공
“그들에게 후추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아히(aji)가 매우 많았는데, 이것은 후추보다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히 없이 식사를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

1492년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콜럼버스가 남긴 기록이다. 콜럼버스 일행은 새로운 땅에서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카사바, 호리병박, 담배, 옥수수, 고구마, 목화, 호박 등 수많은 작물들을 발견하고 기록해 놓았다. 그중 하나인 ‘아히’는 고추였다. 콜럼버스 이후 스페인 항해자들은 고추를 유럽에 전했다. 바스코 다 가마를 필두로 한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중남미에서 접한 고추를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가져갔다. 첫 발견 이후 500년도 안 돼서 고추는 전 세계 식탁을 점령하고 음식문화를 바꿔놓았다.

페퍼 로드는 고추의 식물학적 특성과 역사, 각국의 음식문화에 미친 영향 등을 추적한 인문학 탐사기이자, 원산지인 중남미로부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전 세계로 전파된 길을 따라가는 여행기다. 식물학과 민족학을 전공한 저자는 일본 교토대 농학부 시절인 1968년 남미 안데스 일대를 답사하다 볼리비아에서 우연히 야생 고추를 접한 이후 50년 가까이 고추를 연구해온 전문가다.

[책마을] 삼시세끼 고추…진짜 매운 맛의 고수는 부탄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남미 대륙에서 고추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000~7500년께다. 현재 멕시코에서 자라는 고추만 600종 이상이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도 남미에는 야생종 고추가 있다는 사실이다. 야생 고추는 새끼손가락 끝마디 정도 크기로 작고, 위쪽을 향해 직립 상태로 열린다. 열매가 익었을 때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툭툭 떨어진다. 빨간색, 직립, 탈락성 등은 종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진화 전략이다. 새에게 쉽게 발견돼 쪼아 먹히면 더 먼 지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

야생종 고추는 재배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크기와 색, 모양이 달라졌다. 재배되는 고추는 쉽게 떨어지지 않고, 새에게 먹히지 않도록 아래쪽으로 열리며, 너무 부담스럽지 않도록 매운맛이 덜해졌다. 크기도 커졌다.

세계 각지로 전파된 고추가 각국의 음식문화에 영향을 미친 이야기도 다양하다. 파프리카의 원산지가 헝가리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오스만제국이 헝가리를 점령했던 17세기에 터키 사람들을 통해 전파된 이후 파프리카가 됐다고 한다. 헝가리의 주요 파프리카 생산지는 헝가리평원의 세게드와 컬로처이다. 고추의 약효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이가 바로 193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얼베르트 센트죄르지 세게드의과대학 교수였다. 그는 괴혈병 치료에 유효한 비타민C를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파프리카에 오렌지나 레몬의 5~6배에 달하는 비타민C가 함유돼 있음을 밝혀 비타민C를 값싸게 얻는 길을 열었다.

이탈리아 남부에는 인구가 5000명에 불과하지만 전국적으로 3000명의 회원을 두고 고추 가공공장과 관광객을 위한 상점, 고추박물관,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100여 종의 고추 컬렉션 등을 운영하는 디아만테란 도시가 있다고 한다. 노예무역을 통해 유입된 고추가 녹말을 주로 하고 채소나 생선 요리를 추가하는 서아프리카의 가난한 식탁을 급속도로 바꿔놓은 이야기도 소개한다. 붉은 고추를 숯과 함께 새끼줄에 꿰어 놓았던 우리의 금줄처럼 무시무시한 까만 인형과 함께 라임, 떫은맛을 내는 나무열매, 파란 고추를 철사로 꿰어 악령을 쫓는 인도의 ‘고추 부적’ 이야기도 흥미롭다.

고추라면 뒤지지 않을 한국인들이 세계에서도 통할까. 저자는 진정한 고추 마니아는 부탄 사람들이라고 한다. 부탄에선 고추를 향신료가 아니라 채소로 여기기 때문이다. 부탄의 국민음식 에마다시는 고추에 치즈와 버터를 넣어 삶은 것으로, 저자에겐 혀는 물론 목까지 마비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부탄 사람들의 모든 식사에는 고추가 들어가고, 에마다시만으로 삼시세끼를 해결하는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저자의 페퍼 로드 기행은 남미에서 시작해 지구를 오른쪽으로 돌며 유럽,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끝을 맺는다. 고추는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전파됐는데 거꾸로 알고 있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 6·25전쟁 때 고추 농사가 어려워지자 한국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미국이 일본에서 고추를 수입하면서 특수를 누렸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책이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