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서는 제본해 10부 제출, 요약본 별도 10부 제출, 요약서가 들어 있는 CD 두 개….”

조달청의 전자조달 플랫폼인 나라장터에 떠 있는 정부사업 입찰에 요구되는 서류 양식이다. 얼마 전 한 입찰에 참여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대표는 분통을 터뜨렸다. “제안서는 보통 파워포인트 100장 정도입니다. 요약본도 40장이 넘고요. 이걸 10부씩 뽑으면 A4 용지 1400장을 제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CD 두 개라니요. 요즘 노트북에는 CD롬 드라이브도 없어요.”

관행으로 해 오던 일이었겠지만 시대 변화에 민감한 스타트업 임직원들은 이런 요구에 한숨부터 쉰다. “업체가 10개면 제출 서류만 1만4000장이 됩니다. 정부가 클라우드 만들어서 파일 올린 뒤 태블릿을 활용하거나 정히 필요한 경우엔 출력하면 될텐데요.” 그간 정부가 여러 번 제출 서류를 간소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혔고 일부 개선된 면도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정부 과제를 따내려면 묵직한 서류 박스를 들고 줄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입찰 과정뿐 아니다. 정부와 일하면서 업체들이 당혹감을 겪는 사례는 많다. 스타트업 A사는 1년짜리 국책 연구 과제를 따내고 이를 수행했지만 과제가 끝난 지 1년이 다되도록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다. 최종 작업 뒤 2개월 내에 시행돼야 하는 정부의 현장평가가 진행되지 않아서다.

스타트업 B사는 국책 과제를 수행한 뒤 오히려 돈을 토해냈다. B사 대표는 “A부처가 발주한 과제를 수주해 지침에 따라 예산을 썼는데 나중에 B부처가 ‘불법’이라며 예산을 다시 돌려달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A부처와의 통화 내용을 녹음까지 해서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푸념했다. 부처 간 소통이 안 된 책임을 스타트업에 떠넘긴 것이다.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등 신기술이 경제를 이끄는 시대다. 이런 기술로 새로운 사업을 만드는 스타트업이 국가의 미래라는 말도 많이 한다. 그러나 정부와 일을 해본 다수의 스타트업들은 ‘손사래’를 친다. ‘서류 1400장과 CD’는 4차 산업혁명과는 너무 멀어 보인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