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종의 '중국 인문기행'] 낭만·자유 좇는 초(楚)문화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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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후베이(湖北)
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후베이(湖北)의 인구는 2016년 기준 약 5880만 명이다. 면적은 약 18만㎢로 한반도보다 조금 작은 편이다. 대륙의 주요 지역 복판을 이루고 있어 내륙 교통의 으뜸 요지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맥락 속의 설명에 불과하다.
후베이는 대륙의 인문(人文)이라는 흐름을 따질 때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중국 대륙 남쪽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초(楚)’를 대표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초’문화는 흔히 형초(荊楚)라고도 적는다. 荊(형)과 楚(초) 두 글자 모두 관목(灌木)의 하나로, 이곳 야생에 가득 자라 있던 싸리나무의 한 종류를 가리켰던 데서 비롯한 것으로 푼다. 정통 북부 중원(中原)의 시각으로 볼 때 이곳은 늘 싸리나무만 가득한 야만(野蠻)의 땅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이곳을 적는 대표적인 글자의 다른 하나는 鄂(악)이다. 원래는 단순한 지명이었다가 행정 중심으로서의 역할이 돋보여 수(隋)나라 이후 아예 이곳을 대표하는 글자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후베이 자동차들은 번호판 앞에 이 글자를 달고 다닌다.
풍부한 경제력의 魚米之鄕
이곳의 남쪽에 있는 행정구역 명칭은 후난(湖南)이다. 중국 제4대 내륙 호수인 둥팅후(洞庭湖)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지역을 후베이(湖北), 그 남쪽을 후난(湖南)으로 적었다. 따라서 후난과 후베이는 인문적인 맥락이 거의 비슷하다. 이곳 원주민은 묘족(苗族)이나 토가족(土家族)이었으리라고 학자들은 본다. 이들이 원래 자리를 잡았던 터전에 중원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내려와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시대 독특한 초나라 문화를 형성했으리라는 추정이다. 특히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신 축융(祝融)이라는 존재가 주목을 받는 편이다. 일반적으로는 축융을 황허(黃河)문명의 한 갈래로 설명을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중국 바깥에서 유입했으리라는 추정도 나온다. 특히 불을 숭배했던 조로아스터교의 일파였으리라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등장하는 상황이다.
후베이는 장한(江漢) 평원이 유명하다. 창장(長江)과 한장(漢江)이 만나면서 이뤄지는 큰 평원이다. 옛 초나라의 문화를 뒷받침했던 경제력은 이곳에서 나왔다. 미곡(米穀)과 하천의 생선이 풍부해 어미지향(魚米之鄕)의 별칭을 얻게끔 만든 토대다. 둥팅후를 비롯해 수많은 호수가 발달해 후베이는 千湖之省(천호지성)으로도 불린다. 아울러 아주 먼 옛날 후베이 지역의 방언으로 호수를 나타냈던 말(夢)을 인용해 이곳 전체를 雲夢澤(운몽택)으로도 적는다. 이 명칭은 제법 운치가 있다. 지금 한자 뜻으로는 ‘구름과 꿈의 호수와 늪지’이니 말이다. 수많은 호수와 늪지에 구름은 자주 머물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자라난 초의 문화는 늘 환상과 꿈, 낭만과 자유를 좇는 흐름으로 나타났다.
후베이 인문을 대표하는 인물 屈原
후베이의 인문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은 굴원(屈原)이다.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위선과 거짓에 저항하다가 끝내 제 몸을 강에 던져 절개를 지키려고 했던 문인이자 관료였다. 그의 작품이 담긴 《초사(楚辭)》는 풍부한 상상, 몽환과도 같은 정신세계로 유명하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현실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북방의 대표적인 문학 《시경(詩經)》과는 대척점을 이루는 중국 남방문학의 초기 작품이다. 초나라 문화는 그렇듯 현실보다 이상, 정형(定型)보다 비정형(非定型), 직선(直線)보다 유선(流線)의 문화적 함의에 치중하는 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후베이 사람들은 교활하다는 평도 듣는다. 구름 가득한 호수와 평원 위에서 다져진 유현(幽玄)한 사고의 습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는 머리 아홉 달린 새가 있다면, 땅에는 후베이 사람이 있다”는 말이 뒤따른다. 머리가 아홉이어서 아주 영리한 새에 비견할 만한 지혜와 의중(意中)을 후베이 사람들이 갖췄다는 얘기다. 따라서 권모와 술수에 능하다는 평도 듣는다. 좀체 직접 부딪히지 않지만 교묘한 싸움 방식을 선호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회주의 중국 건국 과정에서 가장 신비로운 전투 방식을 선보였다가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 떠오르기도 했던 린뱌오(林彪)가 현대 중국에서의 대표적 후베이 태생 인물이다.
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후베이는 대륙의 인문(人文)이라는 흐름을 따질 때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중국 대륙 남쪽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초(楚)’를 대표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초’문화는 흔히 형초(荊楚)라고도 적는다. 荊(형)과 楚(초) 두 글자 모두 관목(灌木)의 하나로, 이곳 야생에 가득 자라 있던 싸리나무의 한 종류를 가리켰던 데서 비롯한 것으로 푼다. 정통 북부 중원(中原)의 시각으로 볼 때 이곳은 늘 싸리나무만 가득한 야만(野蠻)의 땅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이곳을 적는 대표적인 글자의 다른 하나는 鄂(악)이다. 원래는 단순한 지명이었다가 행정 중심으로서의 역할이 돋보여 수(隋)나라 이후 아예 이곳을 대표하는 글자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후베이 자동차들은 번호판 앞에 이 글자를 달고 다닌다.
풍부한 경제력의 魚米之鄕
이곳의 남쪽에 있는 행정구역 명칭은 후난(湖南)이다. 중국 제4대 내륙 호수인 둥팅후(洞庭湖)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지역을 후베이(湖北), 그 남쪽을 후난(湖南)으로 적었다. 따라서 후난과 후베이는 인문적인 맥락이 거의 비슷하다. 이곳 원주민은 묘족(苗族)이나 토가족(土家族)이었으리라고 학자들은 본다. 이들이 원래 자리를 잡았던 터전에 중원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내려와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시대 독특한 초나라 문화를 형성했으리라는 추정이다. 특히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신 축융(祝融)이라는 존재가 주목을 받는 편이다. 일반적으로는 축융을 황허(黃河)문명의 한 갈래로 설명을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중국 바깥에서 유입했으리라는 추정도 나온다. 특히 불을 숭배했던 조로아스터교의 일파였으리라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등장하는 상황이다.
후베이는 장한(江漢) 평원이 유명하다. 창장(長江)과 한장(漢江)이 만나면서 이뤄지는 큰 평원이다. 옛 초나라의 문화를 뒷받침했던 경제력은 이곳에서 나왔다. 미곡(米穀)과 하천의 생선이 풍부해 어미지향(魚米之鄕)의 별칭을 얻게끔 만든 토대다. 둥팅후를 비롯해 수많은 호수가 발달해 후베이는 千湖之省(천호지성)으로도 불린다. 아울러 아주 먼 옛날 후베이 지역의 방언으로 호수를 나타냈던 말(夢)을 인용해 이곳 전체를 雲夢澤(운몽택)으로도 적는다. 이 명칭은 제법 운치가 있다. 지금 한자 뜻으로는 ‘구름과 꿈의 호수와 늪지’이니 말이다. 수많은 호수와 늪지에 구름은 자주 머물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자라난 초의 문화는 늘 환상과 꿈, 낭만과 자유를 좇는 흐름으로 나타났다.
후베이 인문을 대표하는 인물 屈原
후베이의 인문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은 굴원(屈原)이다.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위선과 거짓에 저항하다가 끝내 제 몸을 강에 던져 절개를 지키려고 했던 문인이자 관료였다. 그의 작품이 담긴 《초사(楚辭)》는 풍부한 상상, 몽환과도 같은 정신세계로 유명하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현실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북방의 대표적인 문학 《시경(詩經)》과는 대척점을 이루는 중국 남방문학의 초기 작품이다. 초나라 문화는 그렇듯 현실보다 이상, 정형(定型)보다 비정형(非定型), 직선(直線)보다 유선(流線)의 문화적 함의에 치중하는 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후베이 사람들은 교활하다는 평도 듣는다. 구름 가득한 호수와 평원 위에서 다져진 유현(幽玄)한 사고의 습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는 머리 아홉 달린 새가 있다면, 땅에는 후베이 사람이 있다”는 말이 뒤따른다. 머리가 아홉이어서 아주 영리한 새에 비견할 만한 지혜와 의중(意中)을 후베이 사람들이 갖췄다는 얘기다. 따라서 권모와 술수에 능하다는 평도 듣는다. 좀체 직접 부딪히지 않지만 교묘한 싸움 방식을 선호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회주의 중국 건국 과정에서 가장 신비로운 전투 방식을 선보였다가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 떠오르기도 했던 린뱌오(林彪)가 현대 중국에서의 대표적 후베이 태생 인물이다.
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