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정부R&D '5년 트랩' 걷어내고 기업가정신 북돋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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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신성장동력의 성패
정권마다 내세운 '성장동력'…실제는 추격형 전략 못벗어나
법·제도는 혁신을 규제…'기업가 공간' 위축도 결정적 패착
정권 초월한 장기R&D 등 기술·제도·기업인 공진화(共進化)토록 해야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정권마다 내세운 '성장동력'…실제는 추격형 전략 못벗어나
법·제도는 혁신을 규제…'기업가 공간' 위축도 결정적 패착
정권 초월한 장기R&D 등 기술·제도·기업인 공진화(共進化)토록 해야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은 변화를 거듭해 왔다. 경공업에서 자동차·조선 등 중화학공업으로, 전자산업으로, 반도체·휴대폰 등 정보통신기술(ICT) 제조업으로 바통 터치가 이어졌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계기로 추격형 성장전략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신성장동력이 한국 경제의 키워드로 본격 등장, 들어서는 정권마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성장동력의 실체가 사라지는 악순환이 반복돼 온 게 벌써 20년이다. 4차 산업혁명을 신성장동력으로 공약한 새 정부는 과연 이 악순환을 깰 수 있을까.
김대중 정부는 2011년 3월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환경기술(ET), 문화기술(CT) 등 이른바 ‘5T’로 대표되는 ‘차세대 성장산업’ 육성 방향을 제시했다. 뒤이어 노무현 정부는 2003년 8월 ‘10대 차세대 성장동력산업’을 발표했다. 지능형 로봇 등 10대 산업, 44개 품목, 147개 기술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후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2008년 12월 ‘신성장동력’이라며 녹색기술산업 등 3대 산업군 17개 분야를 선정했다. 17개 분야는 다시 62개 스타브랜드, 222개 전략품목, 1197개 핵심기술로 세분화됐다. 박근혜 정부는 더 현란했다. 13대 메가 프로젝트(2013년 12월), 13대 미래성장동력과 13대 산업엔진프로젝트(2014년 3월), 19대 미래성장동력(2015년 3월), 10대 미래성장동력(2016년 3월), 9대 국가전략프로젝트(2016년 8월), 9대 미래신성장 테마(2017년 1월) 등이 쏟아졌다.
차세대 성장, 신성장, 미래성장 등 성장동력이 정권 따라 간판을 바꿔 달며 춤춰 온 점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과가 제대로 날 리 없다. 추동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4차 산업혁명을 성장동력으로 내걸겠다는 새 정부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것은 여기서부터다.
5년마다 바뀌었던 新성장동력
리처드 넬슨 등 혁신을 진화론으로 접근하는 학자들은 새로운 성장동력이 등장하려면 세 가지 공간이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기술 공간, 법·제도 공간, 그리고 사업 아이디어를 짜내는 기업가 공간 등의 이른바 ‘공진화(co-evolution)’ 이론이다.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의 둑이 터지고, 이것이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될 기존의 법과 제도상의 문제가 해소돼야 하며, 기업가들이 시장에서 경쟁적으로 혁신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 관점에서 접근하면 지난 정권들이 내건 성장동력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잡힌다.
먼저 과학기술부터 보자. 《기업가형 국가》를 통해 정부의 역할을 조명한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정부는 기업이 투자를 회피하거나 주저하는,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를 선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성장동력 추진을 정당화하는 이른바 ‘불모지 개척론’이다. 윌리엄 제인웨이도 비슷한 논지다. 《혁신경제에서 자본주의 하기》에서 정부의 역할은 연구개발(R&D) 실패에 대해 높은 관용적 자세를 취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지난 20년 동안 성장동력을 외쳐온 한국 정부는 과연 그랬을까.
당장 정권마다 단기적 성과 내기에 집착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은 그 방편이었다. 말로는 신성장동력을 외치면서 과거 추격형 전략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이러다 보니 정부가 성장동력을 타기팅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감도 커지고 있다. 정권마다 내건 성장동력이 도전적·선도적이지 못했다는 또 하나의 방증이다. 정부 스스로 ‘퍼스트 무버’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두 예정된 실패 수순 밟아
과학기술에서 돌파구가 열린다고 해도 법·제도는 또 다른 문제다. 법·제도가 한국에선 과학기술보다 더 큰 ‘허들’이라고 할 정도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창조적 학습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do)’, ‘하지 않는 일(don’t)’ 모두 산업정책이라고 주장한다. 성장동력 정책은 그만큼 전략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 현실은 달랐다. 규제개혁을 외치지 않은 정권이 없었지만 하나같이 실패했다. 정권 말로 가면서 규제는 더 늘어났다. 규제 불확실성이 오히려 높아진 것이다. 심지어 법·제도가 새로운 성장동력의 길을 터주기는커녕 기득권 이해집단의 저항, 정치적 로비에 굴복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성장동력을 실현할 기업가는 어떤가. 에드먼드 펠프스가 《대번영의 조건》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기업가의 폭발’이다. ‘아래로부터의 혁신’ ‘자생적 혁신’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벤처 붐도 잠시, 기업가정신이 갈수록 사그라드는 추세다.
‘대기업은 안되고, 중소기업은 된다’는 이분법적 논란을 벌이는 나라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할 정도다. 성장동력 관점에서는 ‘혁신하는 쪽’과 ‘저항하는 쪽’의 구분이 더 유용할지 모른다. 성장동력은 필연적으로 구조조정이라는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혁신하는 쪽보다 저항하는 쪽의 손을 들어주기 일쑤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추구하는 기업가 공간이 폭발할 리 없다. 결국 과학기술, 법·제도, 기업가 공간이 내부 모순에 빠지거나 각기 따로 논 게 패착이었다.
새 정부가 신성장동력에 성공하려면 위에서 말한 공진화 관점에서 얼마나 구조적 접근을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당장 시급한 과제는 미국 등 선진국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이 동등한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규제를 푸는 일이다. 빅데이터·인공지능 등을 가로막는 개인정보보호법, 핀테크(금융기술)를 울게 하는 은산(銀産)분리 규제, 보건의료 혁신을 저지하는 의료법 등을 그대로 놔두고선 성장동력은 공염불이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기업가들에게 길을 터 줘야
‘파괴적 혁신’이 몰아치는 시대에 ‘대기업 규제, 중소기업 보호’라는 낡은 기업정책도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대기업, 중소기업 다 죽는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성장동력 창출은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기업가들이 자유롭게 사업을 재편하고 인수합병에 나설 수 있게 길을 터 줘야 한다.
추격형이 아니라 개척형 성장동력으로 가려면 과학기술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 연구개발이 ‘5년 트랩’에 갇혀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연구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한국이라고 정권을 초월한 10년, 20년 장기 프로젝트를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
김대중 정부는 2011년 3월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환경기술(ET), 문화기술(CT) 등 이른바 ‘5T’로 대표되는 ‘차세대 성장산업’ 육성 방향을 제시했다. 뒤이어 노무현 정부는 2003년 8월 ‘10대 차세대 성장동력산업’을 발표했다. 지능형 로봇 등 10대 산업, 44개 품목, 147개 기술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후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2008년 12월 ‘신성장동력’이라며 녹색기술산업 등 3대 산업군 17개 분야를 선정했다. 17개 분야는 다시 62개 스타브랜드, 222개 전략품목, 1197개 핵심기술로 세분화됐다. 박근혜 정부는 더 현란했다. 13대 메가 프로젝트(2013년 12월), 13대 미래성장동력과 13대 산업엔진프로젝트(2014년 3월), 19대 미래성장동력(2015년 3월), 10대 미래성장동력(2016년 3월), 9대 국가전략프로젝트(2016년 8월), 9대 미래신성장 테마(2017년 1월) 등이 쏟아졌다.
차세대 성장, 신성장, 미래성장 등 성장동력이 정권 따라 간판을 바꿔 달며 춤춰 온 점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과가 제대로 날 리 없다. 추동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4차 산업혁명을 성장동력으로 내걸겠다는 새 정부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것은 여기서부터다.
5년마다 바뀌었던 新성장동력
리처드 넬슨 등 혁신을 진화론으로 접근하는 학자들은 새로운 성장동력이 등장하려면 세 가지 공간이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기술 공간, 법·제도 공간, 그리고 사업 아이디어를 짜내는 기업가 공간 등의 이른바 ‘공진화(co-evolution)’ 이론이다.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의 둑이 터지고, 이것이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될 기존의 법과 제도상의 문제가 해소돼야 하며, 기업가들이 시장에서 경쟁적으로 혁신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 관점에서 접근하면 지난 정권들이 내건 성장동력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잡힌다.
먼저 과학기술부터 보자. 《기업가형 국가》를 통해 정부의 역할을 조명한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정부는 기업이 투자를 회피하거나 주저하는,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를 선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성장동력 추진을 정당화하는 이른바 ‘불모지 개척론’이다. 윌리엄 제인웨이도 비슷한 논지다. 《혁신경제에서 자본주의 하기》에서 정부의 역할은 연구개발(R&D) 실패에 대해 높은 관용적 자세를 취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지난 20년 동안 성장동력을 외쳐온 한국 정부는 과연 그랬을까.
당장 정권마다 단기적 성과 내기에 집착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은 그 방편이었다. 말로는 신성장동력을 외치면서 과거 추격형 전략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이러다 보니 정부가 성장동력을 타기팅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감도 커지고 있다. 정권마다 내건 성장동력이 도전적·선도적이지 못했다는 또 하나의 방증이다. 정부 스스로 ‘퍼스트 무버’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두 예정된 실패 수순 밟아
과학기술에서 돌파구가 열린다고 해도 법·제도는 또 다른 문제다. 법·제도가 한국에선 과학기술보다 더 큰 ‘허들’이라고 할 정도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창조적 학습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do)’, ‘하지 않는 일(don’t)’ 모두 산업정책이라고 주장한다. 성장동력 정책은 그만큼 전략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 현실은 달랐다. 규제개혁을 외치지 않은 정권이 없었지만 하나같이 실패했다. 정권 말로 가면서 규제는 더 늘어났다. 규제 불확실성이 오히려 높아진 것이다. 심지어 법·제도가 새로운 성장동력의 길을 터주기는커녕 기득권 이해집단의 저항, 정치적 로비에 굴복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성장동력을 실현할 기업가는 어떤가. 에드먼드 펠프스가 《대번영의 조건》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기업가의 폭발’이다. ‘아래로부터의 혁신’ ‘자생적 혁신’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벤처 붐도 잠시, 기업가정신이 갈수록 사그라드는 추세다.
‘대기업은 안되고, 중소기업은 된다’는 이분법적 논란을 벌이는 나라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할 정도다. 성장동력 관점에서는 ‘혁신하는 쪽’과 ‘저항하는 쪽’의 구분이 더 유용할지 모른다. 성장동력은 필연적으로 구조조정이라는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혁신하는 쪽보다 저항하는 쪽의 손을 들어주기 일쑤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추구하는 기업가 공간이 폭발할 리 없다. 결국 과학기술, 법·제도, 기업가 공간이 내부 모순에 빠지거나 각기 따로 논 게 패착이었다.
새 정부가 신성장동력에 성공하려면 위에서 말한 공진화 관점에서 얼마나 구조적 접근을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당장 시급한 과제는 미국 등 선진국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이 동등한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규제를 푸는 일이다. 빅데이터·인공지능 등을 가로막는 개인정보보호법, 핀테크(금융기술)를 울게 하는 은산(銀産)분리 규제, 보건의료 혁신을 저지하는 의료법 등을 그대로 놔두고선 성장동력은 공염불이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기업가들에게 길을 터 줘야
‘파괴적 혁신’이 몰아치는 시대에 ‘대기업 규제, 중소기업 보호’라는 낡은 기업정책도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대기업, 중소기업 다 죽는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성장동력 창출은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기업가들이 자유롭게 사업을 재편하고 인수합병에 나설 수 있게 길을 터 줘야 한다.
추격형이 아니라 개척형 성장동력으로 가려면 과학기술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 연구개발이 ‘5년 트랩’에 갇혀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연구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한국이라고 정권을 초월한 10년, 20년 장기 프로젝트를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