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젠 정치가 아니고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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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의 정치 극성부렸던 조선처럼
정책 없는 정치만큼 나쁜 건 없어
'정책탕평' 통한 정책공화국 이뤄야"
김태유 < 서울대 교수·경제학 >
정책 없는 정치만큼 나쁜 건 없어
'정책탕평' 통한 정책공화국 이뤄야"
김태유 < 서울대 교수·경제학 >
오늘은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결정하는 날이다. 새로운 한국을 이끌어야 할 대통령이다.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가는 최고 책임자가 되는 영광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위 천명(天命)을 받아야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가문의 영광이고 정파의 영광이지만, 당선이 곧 국가와 민족의 영광은 아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부터 조선까지만 해도 천명을 받아 이 나라를 통치한 최고지도자가 총 116명이다. 그런데 국가와 민족의 영광이라 회자될 만한 치적을 남긴 이가 몇이나 될까. 대륙을 호령하던 광개토대왕과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성군(聖君)의 상징이라면 반대로 민족의 수치라고 할 만한 이들도 있었다. 개국 이래 처음으로 외적(外賊)에 나라를 빼앗긴 고종이 지탄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쇠락한 왕조를 물려받아 부국강병의 꿈도 이루지 못했고, 또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망국(亡國)만은 막아보려고 몸부림치다가 일제에 의한 폐위와 독살로 추정되는 비운의 최후를 맞이한 황제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버릴 수는 없다.
그럼 조선은 도대체 왜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조선 중기 붕당(朋黨) 이래 조선에는 정치만 있었지 정책은 없었다. 정치가 나라를 이끌어가는 큰 방향이라면, 정책은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수단이다. 명분을 앞세운 사색당파가 당리당략과 사리사욕만 추구했다고 매도되는 것은 정치적 명분의 옳고 그름 때문이 아니라 정책적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붕당 정치는 국민을 위한 실사구시의 참신한 정책도 당파를 핑계로 국정에서 소외시키기 일쑤였다. 실학자 이중환은 1751년 택리지에서 “비록 행실을 닦고 덕을 쌓은 사람이라도 자기 당파가 아니면 나쁜 점이 있는지를 살핀다”고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며 “조선의 선비로서 붕당에 가담하지 않으려면 벼슬을 버리고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주옥 같은 정책들도 결국 빛을 보지 못한 채 망국의 치욕을 겪은 조선 사회는 현재 우리에게도 매우 낯익은 정치 공화국이었던 것이다.
복수정당제를 기반으로 한 정당정치제도가 영국을 최초의 근대 국가로, 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발전시킨 것을 보면 정치란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영국이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선진 강대국들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사색당파가 복수정당제를 시도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선도했던 것과 같은 실사구시의 정책이 조선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정치가 가치지향적인 성향이 강하다면 정책은 가치중립적인 성격이 강하다. 동인과 서인의 실사구시가 서로 다를 수 없듯이 4차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에도 진보와 보수가 다를 수 없다. 조선의 탕평책(蕩平策)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정치탕평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공하는 대통령, 성공하는 정부의 대(大)탕평은 정치탕평이 아니라 정책탕평이 돼야 한다. 단, 정책탕평을 위한 인재등용에는 정치 검증이 아니라 과거 업적의 객관적 평가에 기반한 엄정한 정책 검증을 통해 옥석을 가려야 한다. 국제수준의 논문도 저술도 없는 ‘폴리페서’들에게 국정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가 수호되는 한 진보든 보수든 서로 다른 정치일 뿐 좋고 나쁜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정책이 없는 정치만큼 나쁜 정치는 없다. 그런 정치를 이름하여 공리공론정치, 포퓰리즘정치, 감언이설정치라고 부른다.
제19대 대통령의 탄생이 국가와 민족의 영광이 되려면 대한민국이 정치공화국이 아니라 정책공화국이 돼야 한다.
김태유 < 서울대 교수·경제학 >
삼국을 통일한 신라부터 조선까지만 해도 천명을 받아 이 나라를 통치한 최고지도자가 총 116명이다. 그런데 국가와 민족의 영광이라 회자될 만한 치적을 남긴 이가 몇이나 될까. 대륙을 호령하던 광개토대왕과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성군(聖君)의 상징이라면 반대로 민족의 수치라고 할 만한 이들도 있었다. 개국 이래 처음으로 외적(外賊)에 나라를 빼앗긴 고종이 지탄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쇠락한 왕조를 물려받아 부국강병의 꿈도 이루지 못했고, 또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망국(亡國)만은 막아보려고 몸부림치다가 일제에 의한 폐위와 독살로 추정되는 비운의 최후를 맞이한 황제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버릴 수는 없다.
그럼 조선은 도대체 왜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조선 중기 붕당(朋黨) 이래 조선에는 정치만 있었지 정책은 없었다. 정치가 나라를 이끌어가는 큰 방향이라면, 정책은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수단이다. 명분을 앞세운 사색당파가 당리당략과 사리사욕만 추구했다고 매도되는 것은 정치적 명분의 옳고 그름 때문이 아니라 정책적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붕당 정치는 국민을 위한 실사구시의 참신한 정책도 당파를 핑계로 국정에서 소외시키기 일쑤였다. 실학자 이중환은 1751년 택리지에서 “비록 행실을 닦고 덕을 쌓은 사람이라도 자기 당파가 아니면 나쁜 점이 있는지를 살핀다”고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며 “조선의 선비로서 붕당에 가담하지 않으려면 벼슬을 버리고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주옥 같은 정책들도 결국 빛을 보지 못한 채 망국의 치욕을 겪은 조선 사회는 현재 우리에게도 매우 낯익은 정치 공화국이었던 것이다.
복수정당제를 기반으로 한 정당정치제도가 영국을 최초의 근대 국가로, 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발전시킨 것을 보면 정치란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영국이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선진 강대국들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사색당파가 복수정당제를 시도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선도했던 것과 같은 실사구시의 정책이 조선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정치가 가치지향적인 성향이 강하다면 정책은 가치중립적인 성격이 강하다. 동인과 서인의 실사구시가 서로 다를 수 없듯이 4차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에도 진보와 보수가 다를 수 없다. 조선의 탕평책(蕩平策)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정치탕평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공하는 대통령, 성공하는 정부의 대(大)탕평은 정치탕평이 아니라 정책탕평이 돼야 한다. 단, 정책탕평을 위한 인재등용에는 정치 검증이 아니라 과거 업적의 객관적 평가에 기반한 엄정한 정책 검증을 통해 옥석을 가려야 한다. 국제수준의 논문도 저술도 없는 ‘폴리페서’들에게 국정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가 수호되는 한 진보든 보수든 서로 다른 정치일 뿐 좋고 나쁜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정책이 없는 정치만큼 나쁜 정치는 없다. 그런 정치를 이름하여 공리공론정치, 포퓰리즘정치, 감언이설정치라고 부른다.
제19대 대통령의 탄생이 국가와 민족의 영광이 되려면 대한민국이 정치공화국이 아니라 정책공화국이 돼야 한다.
김태유 < 서울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