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에서 10일 개막한 정기호 화백의 개인전에 출품된 ‘엘 샤다이’.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에서 10일 개막한 정기호 화백의 개인전에 출품된 ‘엘 샤다이’.
프랑스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정기호 화백(78)에게 그림은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다. 그는 체계적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늘 숨을 쉬듯 그림에 매달렸다. 스스로 고립과 은둔 속에서 작업하다가 더 이상 그릴 캔버스가 없으면 벽과 바닥에 그렸다.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캔버스는 언제나 그에게 쉴 곳이 돼 주었고, 삶은 녹록지 않았지만 부단한 실험으로 특유의 기하학적 작품세계를 개척했다.

10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막을 올린 ‘정기호의 숨, 쉼, 삶’ 전은 한평생 그림에 몰두한 노화가의 열정을 미학적인 날줄과 동심의 씨줄로 변주한 자리다. 한때 파리의 갤러리 아르쿠르 전속작가로 활동한 그는 평생 붓을 놓은 적이 없으니 그림과 동행한 50여년 세월이 이제 무르익어 짙은 푸른색의 아우라로 번지고 있다.

1939년 일본에서 태어난 정 화백은 9세 때부터는 전북 남원에서 성장했다. 1995년 파리로 건너가 2008년 귀국할 때까지 유럽 화단에서 활동하며 파리 국립미술협회 회원과 파리 국립미술전 영구회원이 됐다.

27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는 해학적인 요소를 가미해 동심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표현한 작품 20여점을 걸었다. 유쾌한 필선과 원색으로 동심을 담아낸 작품들은 그의 삶을 응축한 자화상처럼 에너지를 뿜어낸다.

노환으로 투병 중인 정 화백은 온 몸을 던져 그림에 전력해온 자신의 삶을 탈탈 털어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이 땅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시대적 소명에 대한 나름의 고민도 풀어냈다.

그는 꿈, 사랑, 자유를 소재로 마음의 거울을 그려놓고 기하학적으로 동시를 썼다. 삼각형과 원형으로 축소된 산과 얼굴, 사각형 식물, 선회하는 꽃잎, 여행하는 별과 바다 등은 화폭에서 천진난만한 놀이 형태로 조응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인물들은 인형처럼 날렵하거나 음표처럼 공중에 떠 있다. 이름을 물을 필요도, 알 필요도 없이 모두가 귀하다. 짙은 푸른색을 배경으로 피카소의 입체파를 연상시키는 구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미술평론가 한의정 씨는 “정 화백이 즐겨 소재로 다루는 아이들의 다락방, 부부의 신혼여행지, 카니발 등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현실에 존재하는 비일상적인 공간) 같은 곳”이라며 “다채로운 삶의 공간을 하나의 캔버스에 기하학적 형태로 켜켜이 쌓아 그만의 소우주(microcosm)를 만들어냈다”고 평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