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깜깜이 선거' 안 되려면…
대선판이 뜨겁다. ‘5·9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치고 올라가면서 그동안 ‘대세론’을 형성했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측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선거 구도가 요동치면서 난타전이 더 치열해지고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정책 경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말로는 ‘미래’를 외치지만 구체방안은 없고, 구호에 그치고 있다.

‘패권청산’ ‘적폐연대’ 공방을 주고받으며 ‘프레임’ 싸움에 매몰돼 가고 있다. 입씨름은 격화되지만, 대선 공약집을 내놓은 후보는 한 사람도 없다. 미국에선 보통 대선 두 달 전 공약집이 나오고, 오는 23일 대선을 치르는 프랑스의 유력 후보들이 지난 2월 초에 공약집을 낸 것과 대비된다. 후보들이 이제 선거대책위원회를 꾸리기 시작해 공약집이 언제 나올지 기약 없다. 유권자들은 블라인드를 치고 ‘깜깜이 투표’를 해야 할 판이다. 짧은 대선 기간에 경선을 치르느라 공약을 제대로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는 게 각 캠프의 주장이다.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전통적 지지층 이외 유권자들의 표심(票心)을 의식한 전략적 판단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물론 ‘사탕발림성 공약’은 일찌감치 나왔다. ‘기초연금 인상’, ‘아동수당 도입’, ‘육아휴직 3년으로 확대’ 등이 대표적이다. 재원은 세금을 더 걷어 충당하자고 한다. 이보다 더 편한 공약 만들기가 어디 있을까 싶다. 차기 대통령은 선거 바로 다음날 취임해야 하고, 곧바로 북한 핵·미사일 문제와 맞닥뜨려야 한다. 안보가 위중한데 국민의 불안감을 씻어낼 만한 공약을 내놓은 후보도 없다. 지지율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문 후보와 안 후보는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오락가락’ 태도를 보여 불안감을 심어줬다. 문 후보는 사드 배치에 반대했다가 차기 정부로 미루자고 태도를 바꿨다. 안 후보도 작년 7월 사드에 반대하며 국민투표를 주장했다가 올해 초 “양국 간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속정당(국민의당)의 반대 당론과 배치돼 혼선을 주고 있다.

공약의 사전적 의미는 ‘정부와 정당, 입후보자 등이 어떤 일에 대해 국민에게 실행한다는 약속’이다. 유권자들에게 공약은 선택의 기준이 된다. 제품으로 치면 사용 설명서다. 전자제품 하나 사더라도 제품 설명서를 읽고, 이것저것 비교하는 게 보통이다. 분야별로 띄엄띄엄 공약을 발표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일일이 기사를 검색하면서 공약을 찾아볼 유권자들이 얼마나 되겠나. 일반 제품은 마음에 안 들면 반품할 수 있지만 정치 상품은 한 번 선택하면 물릴 수 없다. 공약을 제대로 모르다 보니 역대 선거 때 ‘이미지’와 ‘바람’으로 선택한 게 다반사였다. 대통령이 무엇 하는 자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투표에 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깜깜이 선거’가 치러진다면 유권자의 선택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선택한 대통령에게 난제들을 해결하라는 것은 직무유기다. ‘충동구매’를 해놓고 뒤늦게 “투표했던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고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 유권자도 정신 차려야 하는 이유다. 지난 2월 프랑스에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수입’해 출마시키자는 청원 열풍이 일었다. 대선 출마 후보들이 마음에 들지 않자 오바마를 후보로 내세우자는 것이었다. 우리 대선판에도 오바마를 수입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