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좋아한 건 릴케만이 아니었다. 식민치하 조선의 백석과 윤동주도 그를 사랑했다. 둘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프랑시스 잠과 릴케의 이름을 시에 녹여냈다. 백석은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라고 썼다.
프랑시스 잠 시어에 릴케도 반해
동주도 ‘별 헤는 밤’에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라고 썼다.
이들이 그토록 그리워한 프랑시스 잠은 세기말 프랑스 문학의 퇴폐적인 요소를 씻어낸 자연주의의 대가다. 프랑스 대혁명 후 ‘온갖 것에 대한 불만족’으로 술이나 마약에 탐닉하며 어디로든 도피하려던 세태와는 달랐다. 그는 달아나기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껴안고 어루만지는 포용과 모성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당나귀 이미지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순박함의 상징인 당나귀를 좋아해서 자주 타고 다녔다. ‘나는 당나귀가 좋아’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한 기도’ 같은 시를 썼고 별명도 ‘당나귀 시인’이었다.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미명계’ ‘연자간’ ‘귀농’에 당나귀가 나오고, 동주 시 ‘밤’ ‘곡간’에도 당나귀가 등장한다.
이들과 프랑시스 잠을 잇는 당나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백석이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고 할 때 당나귀는 연인과 함께 산골마을로 가는 꿈의 매개다. 동주가 ‘밤’에서 한밤중 당나귀에 여물짚을 주는 아버지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 모습을 겹친 것도 사랑과 생명과 희망의 메타포다.
증오사회 치유하는 '삼종의 기도'
한편으로는 생의 무게를 말없이 견디는 존재가 당나귀다. 프랑시스 잠은 시집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에서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다’며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들이 살던 시대는 냉엄했다. 프랑시스 잠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기에 태어났다. 백석은 105년 전 청나라가 망한 해에 나서 평생을 변방인으로 살았다. 동주는 100년 전 러시아 혁명기에 나 2차대전이 끝나기 6개월 전 옥사했다. 제국주의와 국수주의가 충돌하던 역사의 격변기에 인간과 삶의 근본을 되새기던 시인들….
지금도 다를 게 없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는 급변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앞세운 열강의 패권 다툼은 치열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집안싸움에 정신이 없다. 분노와 증오, 경멸과 힐난의 ‘팔매질 사회’를 껴안을 희망의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 비관보다 낙관, 슬픔보다 사랑을 노래한 그 시절 시인들처럼 지금 우리 삶은 얼마나 깊이 있고 성찰적이며 엄숙한가.
고두현 논설위원·시인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