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종종 정치로 변질된다.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을 때 그도 실은 정치를 조롱했던 것이다. 환경 논쟁도 그렇다. 아니 환경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주제다.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의 원인을 추적하는 것은 얼른 보기에는 과학적 증거들의 싸움 같지만 놀랍게도 손쉽게 정치로 전환된다. 증거들은 부분적 사실들의 왜곡된 이미지를 쏟아놓을 뿐이다. 이들 ‘유사 사실(pseudo facts)’들은 ‘포스트 진실(post truths)’, 혹은 ‘대체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고도 부른다. 21세기는 특히나 대중이 지배하는 ‘탈지식 사회’다.

언론의 신경병적 보도만 접촉하는 대중, 특히 ‘귀가 얇은 자’들은 마치 탄핵재판에 대해 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형사법적 혹은 실체적 진실이 아니라 정치적 증거만을 믿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렇게 사실과 유사 사실의 중간지대를 헤매고 있다. 사람들은 바닷물이 안방으로 넘실대고, 북극곰이 멸종되는 중이며, 공기와 물과 땅은 모조리 오염됐다는 공포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풀장이 딸린 바닷가 집을 선호하고 그래서 해안가 고급 빌라촌의 가격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중국은 거액을 들여 남중국해 인공섬을 개발 중이고 두바이의 팜 주메이라 같은 바다 인공섬도 세계의 부자들을 불러 모은다.

어떤 일에나 그렇듯이 소수의 의심 많은 사람들, 특히 사실만을 수용하기로 마음먹고 있는 사람들은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환경문제에도 회의적이다. 비요른 람보르도, 스콧 플루잇도 그런 사람이다. 트럼프는 처음부터 ‘환경종말론은 거짓말’이라고 믿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보인다. 람보르는 《회의적 환경주의자》라는 명저를 쓰면서 세계적 논쟁가로 떠오른 통계학자이고, 플루잇은 제14대 미국 환경청(EPA: the US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청장이다. 그는 환경청을 상대로 무려 13번이나 소송전을 벌였던 반(反)환경주의자다. 트럼프는 놀랍게도 이 사람을 지명해 버린 것이다. 민주당과 종말주의적 환경주의자 그룹들이 강력히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데모대가 진을 친다. 플루잇은 화력발전소 온실가스 감축 의무화, 수질 오염방지대책 등을 저지하기 위한 집단소송을 이끌어왔다. 에너지 회사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수압파쇄법(셰일가스 추출 기법)의 옹호자이며, 화석연료 업체로부터 30만달러가 넘는 후원금을 받았다. 인준청문회는 찬성 52명, 반대 46명의 근소한 인준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회의주의자(skeptics)다. “지구는 따뜻해지고 있지만 인간의 활동이 주된 원인이라는 주장은 의심스럽다”거나 “미국 의회가 EPA에 이산화탄소 문제를 다룰 권한을 부여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을 편다.

지난주 발표된 미국 연방 예산안은 충격적이다. 환경 예산은 지난해 86억달러에서 26억달러나 삭감됐다. 환경청 직원 3200명을 감원하고, 기후변화 연구 등 52개 프로젝트를 폐지했다. 29%나 삭감된 국무부 예산에서도 기후와 관련된 국제지원 예산을 대폭 잘라냈다. 아마 한국 송도에 있는 녹색기후기금(GCF) 출연금도 삭감됐을 것이다. 노동부 예산도 4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깎였다. 한국에서 블랙리스트 논란을 불렀고 미국에서도 정치에 따라 좌우가 갈렸던 예술기금 인문학기금도 아예 폐지되거나 이름만 남았다. 확고한 우파 선회다.

한국은 환경 철학이 부재한 상태다. 이명박 정권은 좌파형 녹색성장을 내걸었고 유엔 기후대사였던 한승수를 총리로 기용했다. 박근혜 정부는 전례답습이었다. 파리기후협약에 먼저 서명했고 이산화탄소도 가장 높은 감축률을 내놓아 기업들을 놀라게 했다. 반기문은 환경종말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자의 입을 아예 막아버리자는 극단적 발언을 한 적도 있다. 한국에서는 환경 히스테리는 있어도 과학적 논쟁은 없다. 잘못 말했다간 매를 벌게 된다. 팩트를 찾기도 어렵다. 4대강은 아직도 정치 논쟁 중이다. 과학적 논쟁조차 온통 정치가 뒤덮고 있다. ‘탈지식 사회’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