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깨우는 한시 (22)] 춘래불복당년흥(春來不復當年興) 첩자무심향호제(帖子無心向戶題)
신흠(申欽·1566~1628)의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이다. 삼정승을 두루 역임하고 조선의 4대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며 《상촌집(象村集)》 《야언(野言)》 등의 문집을 남겼다. 임진란 이후 폭주한 명나라 외교문서 작업을 맡았으며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후 정묘호란을 포함한 크고 작은 정치적 격동기에는 타의에 의해 김포로 낙향했다.

즐겨 사용한 상촌(象村)이라는 호는 김포 상두산(象頭山: 코끼리 머리처럼 생긴 산) 근처에서 머문 하방(下放)생활 흔적인 것이다. 그때 머물렀던 집 이름이 하루암(何陋菴)이다. ‘무엇이 누추하냐?’는 뜻이다. 이어진 춘천 유배지 거처를 여암(旅菴·여관)이라 불렀다. 객실(?)에서 5년간 머물렀다. 한양의 정계를 떠난 어려운 시절에도 독서와 함께 좋은 글을 짓고 마음을 풍요롭게 가꾸면서 후일을 도모할 줄도 알았다. 당대의 일반적 지식인과 달리 언문(諺文: 서민계층 글, 훈민정음)을 이용한 한글시조도 30수가량 전해오고 있다.

경북 성주 쪽 가야산 들머리의 회연서원에 있는 정구(鄭逑·1543~1620, 호는 한강) 비문도 상촌선생의 글이다. 이 자리는 백매헌(百梅軒)으로 불릴 만큼 매화로 유명한 곳이다.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서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는 명문도 신흠의 《야언(野言)》을 통해 대중화됐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던가. 어느 해 봄날 몸이 아팠기에 봄이 와도 봄이 아니었다. 병고로 인해 마음까지 수척해졌다. 이 시는 이런저런 이유로 봄을 제대로 느낄 여유조차 없음을 고백한 작품인 것이다.

요즈음 ‘입춘대길(立春大吉)’ 방(榜)을 내붙이는 사람도 귀하다. 입춘첩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전부 아픈 사람밖에 없나 보다. 그래도 입춘을 맞이하며 1년 내내 봄날이길 바라던 선조들의 지혜를 되살려볼 일이다. 절집 안 주변은 삼재(三災: 천재지변과 인재) 예방을 겸한 입춘첩을 내걸었다. 자연재해(天災, 地災)보다 사람 때문에 어려움(人災)이 더 많은 세상이다. 무난한 인간관계 역시 삶의 지혜라 하겠다.

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