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규모(사업비 2조6000억원) 재건축 사업으로 꼽히는 서울 가락시영아파트. 지난해 8월 이곳 조합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한경DB
국내 최대 규모(사업비 2조6000억원) 재건축 사업으로 꼽히는 서울 가락시영아파트. 지난해 8월 이곳 조합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한경DB
재건축을 진행 중인 서울 개포동 주공아파트 4단지 주민들은 지난달 수서경찰서에 “조합장을 수사해 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재건축 후 새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 조합원이 추가로 내야 하는 분담금이 지난해 11월께 가구당 평균 4000만~5000만원씩 오르자 갈등이 수면 위로 불거졌다. 주민들은 “전용 42㎡ 소유주가 새 아파트 84㎡를 분양받는 데 분담금을 4억원 넘게 내야 한다”며 “조합장이 공사비를 너무 높게 책정해 조합원이 내야 하는 분담금이 눈덩이처럼 불었다”고 주장했다.

[경찰팀 리포트] 수조원 주무르는 재건축 조합마저…'구멍가게식 운영' 여전
인천 영종도 운남지구 개발을 위해 2002년 설립된 운남토지구획정리사업조합은 아직도 시끄럽다. 민간이 주도해 주목받은 이 토지개발 사업은 과거 조합장 사기에 횡령·배임, 공무원 뇌물 사건이 줄줄이 터졌다. 현재 청산 절차만 남겨두고 있는데 자금이 100억원 이상 비어 있다. 조합이 연루된 고발·소송 건이 100건을 훌쩍 넘는다. 한 조합원은 “조합 초창기에 비리 사건으로 구속된 임원이 3년 전 조합장이 된 이후 조합원 수십 명을 상대로 온갖 소송을 남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장모 조합장은 이에 대해 “과거 집행부 잘못으로 조합이 많이 망가졌다”며 “정당하게 조합 자금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소송이 많아진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전국 재건축·재개발 사업장 곳곳에서 조합을 둘러싼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조합 사업비는 많게는 수조원에 이르지만 구멍가게 수준으로 투명하지 않게 운영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조합장이 견제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사업 계약을 체결하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집행부가 각종 이권을 미끼로 뒷돈을 받고 있다는 식의 구설이 끊이지 않는다.

총회·이사회 주먹구구식

20일 업계에 따르면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강남 재건축 조합에 대한 현장 점검을 마무리했다. 지난해 11월부터 개포 주공4단지 등 8곳을 조사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재건축 시장이 과열 양상을 보이면서 조합 운영에서 불법행위가 발생할 우려가 커진 데 따른 것”이라며 “내달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토부가 재건축 조합 점검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은 지방자치단체가 조합 비리를 들여다보고 조치한다. 서울시가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조합 비리 관련 수사의뢰·시정명령·환수조치를 내린 건수는 637건에 달한다.

대부분의 조합 비리는 조합원의 무관심 속에 이뤄진다. 조합도 큰 틀에서 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조합원 보호 장치를 두고 있다. 일반 조합원들도 법에 따라 회계자료, 업체 계약서 등을 조합에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대부분의 조합원은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는 총회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서울시가 적발한 조합 비리 사례를 보면 총회가 주먹구구 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지난해 서울의 한 조합은 총회에서 조합장에게 공로금 9억원을 주기로 하는 안건을 총회에서 통과시켰는데 실제로 조합장에게 지급된 조합 돈은 세금 6억6000만원을 합한 15억원이었다.

재건축 조합이 주식회사와 달리 외부 회계감사를 필수로 받지 않는다는 점도 악용된다. 조합 이사회도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사례가 많다. 한 변호사는 “조합장이 견제받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법적 상식이 없는 주민들을 이사진으로 추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특정 용역비 부풀려 가로채기도

전문가들은 조합 비리가 조직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새 아파트를 짓기 위해 조합설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질 때부터 ‘작업’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 주민 중 조합장에 선뜻 나서는 이가 없을 때 ‘정비사업자’라고 부르는 외부 컨설팅업체가 끼어든다. 이들은 지역 동장 등을 만나 전업으로 일할 조합장을 물색하고 자신들과 일할 수 있도록 미리 로비를 한다. 조합장과 짜고 철거, 설계, 법률 자문, 감정평가 등 20가지가 넘는 사업의 협력업체 선정에 관여하려는 의도다.

한 건설사 재건축 담당자는 “강남 대단지 아파트라면 사업비가 조 단위이고 철거공사만 해도 수백억원대에 이른다”며 “철거전문 업체들이 조합장은 물론이고 함께 일하는 컨설팅사에도 로비전을 벌인다”고 말했다.

일부 조합장들은 특정 용역의 사업비를 부풀리는 방식으로 돈을 빼돌린다. 용역업체는 “우리 회사와 일하면 수주금액의 일부를 조합장 몫으로 떼어놓겠다”는 식의 이면 합의를 한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대포통장이나 현금으로 은밀히 돈을 받는다”며 “서류상 티도 나지 않기 때문에 내부 고발자가 없다면 적발도 어렵다”고 말했다.

사업비가 2조6000억원에 달해 국내 최대 재건축 사업장으로 꼽힌 ‘가락시영 아파트’에선 작년 8월 김모씨가 구속 기소됐다. 2003년부터 조합장을 맡아온 그는 용역업체들로부터 억대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건설사들도 시공사로 참여하기 위해 주민들을 상대로 금품·향응을 제공하고 조합장에게 직접 뇌물을 주기도 한다. 서울 은평구 역촌1구역 조합장 양모씨는 지난해 6월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건설업체에 10억원을 요구해 2억원을 받아 조합 이사와 나눴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기도 했다.

김동현 기자 3co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