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2017년의 새로운 해를 보면서 올해도 조금 더 새로워지자고 다짐하게 된다. 하지만 모두 느끼는 바와 같이 일상적인 새해의 다짐이 무색해지는 새해를 맞이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조금이 아니라 엄청난 폭과 깊이로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다. 광화문의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대통령 직무정지와 탄핵심판의 와중에 조류인플루엔자(AI)가 전례 없는 속도와 폭으로 전파됐으며, 농축산물방역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는 일들인데 데자뷔처럼 익숙하다.

국가와 사회 시스템의 총체적인 부실과 무능 그리고 불통은 최순실 사태, AI와 역대 최강의 지진을 통해 지난 한 해 동안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그 이전에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세월호 사태, 가습기 살균제 문제 등을 통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각인돼 왔다.

국가 리더십과 방향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나 또다시 인물론으로 휩쓸려가는 선거 국면이 한편으론 걱정된다. 지난 10년간 누차 확인돼온 것은 이런 국가와 시스템의 무능이 단지 대통령을 바꾸는 것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과학계도 변화와 혁신의 시대적 요청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국가와 시스템의 무능에는 전문가 집단의 무능과 방관자적 무책임도 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일부 이런 난국을 만드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전문가들도 있을 것이다. 청와대 비서진과 각료로 최순실의 심부름을 해왔고 지금은 구치소에 수감된 교수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과학기술계 전반에 걸쳐서 정부와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만들어주고 개인과 집단의 기득권을 유지·확대하려는 교수와 연구원들은 여전히 길게 줄을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라도 최순실 독버섯이 자랄 토양이 충분히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계의 각 기관장 선임과 운영 등에 청와대와 소관부처의 각종 농단이 일상화된 지는 이미 오래다. “과학계에는 블랙 리스트조차도 없다”고 자학하는 한 과학자의 말은 현실의 중요한 한 측면에 닿아 있다.

일군의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자와 연구자가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과학계와 연구계의 리더들과 시스템이 정치적이어서 오히려 과학계가 탈정치적이고 가치중립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문제와 위기에 대해 적절한 발언과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대한 정확하고 과학적인 정보를 정부의 편협한 정치적 판단과 관계없이 전달할 수 있는 전문가집단을 조직할 수는 없는가. 중장기적으로 꼭 필요한 연구를 선별하고 전문가를 지원해 국가와 사회가 좀 더 위기에 준비하도록 할 수는 없을까.

이런 정치화된 과학의 문제는 전문가집단의 사회적 역할을 무력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과학 자체를 망치는 역할도 해왔다. 지난 정부들에서 목도한 현상으로 대학 총장이며, 정부 출연연구소 원장이며, 각종 연구지원재단 이사장 등도 청와대의 의중을 물어 결정하고 낙하산이 내려오는 세상이다. 이러니 무슨 장기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과학이며 연구가 되겠고, 국가와 시민사회의 미래를 위한 과학과 연구가 되겠는가. 이쯤 되면 과학기술계도 시스템의 변화를 생각해봐야 할 때가 됐다.

하지만 이미 유력 대선후보 진영이 소위 대선캠프라는 것을 구성하느라 동분서주하고 과학계 인사들도 좌고우면하는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은 역시 순진한 이상주의자의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과학계가 정부로부터 독립하기는 애당초 어렵다. 하지만 5년마다 정부가 바뀌는데 과학계 전체가 정부 입맛대로 5년마다 뒤집히는 현재의 시스템에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계에서도 변화와 꺼지지 않는 촛불을 기대하는 것은 과한 바람인가. 헛된 새해맞이 덕담에 불과한 것인가.

염한웅 < 포스텍 교수·물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