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죽편' 첫행은 여관방 벽에다 썼제…"
“80년대 후반, 허름한 여관방에서 7시간 이상 어떤 사람을 기다려야 했어요. 기억하기 싫은 ‘고약한 사건’이었지요. 그 방에서 ‘인생이란 대체 뭐길래 내가 여기까지 왔나, 왜 왔나,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온갖 상념으로 7시간을 뒤채는데 갑자기 ‘여기서부터, -멀다’라는 시구가 번개같이 떠오르는 거예요. 종이가 없어 그걸 여관 벽지에다 썼제….”

시인 서정춘(75)의 대표작 ‘죽편(竹篇) 1-여행’은 그렇게 탄생했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백 년 인생을 대나무에 비유한 명편 중 명편이다. 대나무 마디는 인생사를 닮았다. 우리 삶이 수없는 마디로 이어지듯이. ‘여기서부터’ 하고 쉼표를 찍어 한 박자 쉰 다음 하이픈을 그어 ‘대꽃이 피는 마을’이 얼마나 먼지를 절묘하게 표현했으니, 5행 37자 압축미의 극치다.

80번 고쳐 쓴 5줄 시의 탄생 비화

한겨울 밤 인사동 찻집과 밥집에서 듣는 그의 얘기는 짧고 길고 가늘고 굵었다. 숫기가 없어 털어놓지 못했던 이 시의 창작 과정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순간엔 눈빛이 형형했다. “고향 순천엔 대나무가 많았는데 가랑이에 대나무를 끼고 기차놀이하던 기억이 겹쳐졌죠. 여기에 대나무의 수직 이미지와 기차의 수평 이미지, 시간과 공간, 인생과 여행의 의미가 교직되고.”

초고는 25행이 넘었다. 여관방도 등장하고 몇 시간이나 사람을 기다리던 얘기도 들어 있고 이래저래 군더더기가 많았다. 그는 이 시를 4년 동안 80번 이상 고치고 또 고쳤다. 지금도 벽에 시 초고를 붙여놓고 들여다보는 게 버릇이다. 그 옆엔 연필도 매달아놓고. 1968년에 등단했으니 시력 50년을 앞두고 있지만 시집은 고작 다섯 권. 발표한 시는 160편 안팎이다. 1년에 3~4편. 무수히 버리고 줄인 결과다. 첫 시집 《죽편》은 등단 28년 만에 냈다. 동갑내기 고향친구인 소설가 김승옥의 추천으로 동화출판공사에 들어가 꼬박 28년을 일하고 정년퇴임할 때였다. ‘극약같이 짧은’ 시 35편만 묶었다. 그때까지 서랍 속에 모셔뒀던 70여편 중 절반을 버렸다.

1941년 전남 순천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과 독학으로 시의 길을 헤쳐왔다. 신문을 배달하다 우연히 집어든 영랑과 소월의 시집을 밤새 필사했다. 매산중고 야간부 시절 순천여고 앞 9평7홉짜리 초가집에서 300편 이상의 시조를 겁 없이 써제꼈다.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할 때까지 한시와 선시를 탐독하며 앞선 이들을 스승으로 삼았다.

손으로 만든 최근 시집도 딱 29편

최근 시집 《이슬에 사무치다》(글상걸상 펴냄)는 손으로 만들었다. 광목 천으로 배접하고 바느질로 마무리한 수제 시집. 요즘 같은 세상에 느린 손작업이라니! 그래서 더 신기하고 반가웠다. 가내수공 출판전문가가 만들었다. 하루에 15권, 두 달 이상 작업해 1000권을 완성했는데 벌써 2쇄에 들어갔다. 표제작 ‘이슬에 사무치다’ 역시 수없이 고쳤다. 제목도 ‘초로(初露)’에서 ‘이슬보기’로, ‘이슬에 사무치다’로 바꿨다. 월트 휘트먼이 단 한 권의 시집 《풀잎》을 평생 고쳐 쓴 것과 같다.

그의 삶은 이번 시집의 ‘대나무 2’에 나오는 ‘세로쓰기 일행시(一行詩)’를 닮았다. ‘일세를 풍미한 숨 가쁜 문장’. 그는 ‘구구절절, 긴 문장은 잘라 읽어도 좋겠다’고 했다. 요즘 시국이 어지럽지만, 그는 묵묵히 ‘대꽃 피는 마을’을 기다리고 있다.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평생의 믿음과 함께.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