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왔는데도 새해 달력 보기가 쉽지 않다. 12월이면 여기저기서 가져온 달력들이 사무실에 잔뜩 굴러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연말에 거래처 등을 갈 때면 가벼운 인사치레로 으레 옆구리에 달력 몇 개씩 끼고 가던 풍습은 거의 실종된 듯하다. 은행 지점에 가면 고객들에게 그냥 몇 개씩 나눠주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엔 그런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다.

달력이 사라지고 있는 건 다들 짐작할 수 있는 몇몇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요가 많이 줄었다.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젊은이들은 벽에 걸린 달력이 굳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까지 짓는다. 중·장년층 역시 요즘엔 대부분의 스케줄을 스마트폰에 담아놓는다. 그래서 탁상용 소형 달력이라면 모를까, 벽에 거는 커다란 달력을 굳이 구하려는 이는 별로 없다.

선물용으로 제작해왔던 기업들도 이젠 일부러 큰돈 들여 대량으로 달력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달력 말고도 과거에 비해 기업 홍보수단이 워낙 다양해진 데다 비용절감 등의 이유 때문이다. 선물용 달력 하면 떠오르는 은행이나 금융회사 중에는 아예 홍보용 달력을 없앤 곳도 있다. 여전히 달력을 만드는 곳조차 수량은 줄이는 추세다. 국민은행이 작년보다 20만부가량 줄였고 우리은행, 기업은행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한다.

연말에 홍보용 달력을 대량 만들어 돌리는 일은 서양에서는 드물고 동양에서도 유독 한국 특유의 현상이라고 한다. 중국, 일본은 탁상용 달력을 찍는 경우는 있지만 대형 벽걸이 달력을 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 조선 후기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는 동짓날 풍속으로 ‘임금이 모든 관원에게 황색 표지의 황장력(黃粧曆)과 흰색의 백장력(白粧曆)을 반포한다’고 쓰여 있다. 당시에는 동지를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이날 달력을 나눠 줬는데 여기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은행 달력을 집에 걸어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속설도 이런 풍습이 널리 퍼지는 데 일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달력 종이로는 두꺼운 고급 아트지를 쓰는 경우가 많아 종이가 귀하던 시절, 달력 종이는 책커버 등 다양한 용도로 재활용됐다. 또 커다란 숫자로 날짜가 씌어있어 매일 한 장씩 떼어내던 얇은 일력은 화장실 휴지 대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요즘, 종이 달력의 퇴조는 어떻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일지도 모른다. 다만 거기에 담긴 나누는 마음까지는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