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아, 나의 그리운 영혼의 지도자여
얼마 전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 있던 부목사가 담임목사로 간 교회에 집회를 갔다. 거기서 한 노(老) 권사님이 액자를 하나 선물로 주시면서 자기 앞에서 뜯어보라는 것이었다. 뜯어보니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박종삼 목사님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자 아련한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120원짜리 식권 살 돈이 없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신학생 시절, 학교 강의실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를 때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때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시던 박종삼 목사님….

신학교 교장이셨던 목사님께서는 사택에서 소고깃국을 끓이는 날이면 나를 불렀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소고깃국을 뜨실 때 목사님과 아들 국그릇에는 소고기 건더기를 듬뿍듬뿍 주시는데 나의 국그릇엔 무 건더기와 국물만 담아 주셨다. 그때 목사님께서는 당신의 국에 있는 소고기 건더기를 다 떠서 나에게 주셨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의 국에 있는 건더기까지 떠 주셨다. 그러면 사모님이 목사님께 눈을 흘기면서 다시 목사님과 아들의 국그릇에 고기를 떠 준다. 그러면 목사님은 또 그 고기 건더기를 떠서 나에게 주셨다. 나는 목사님의 사랑에 마음이 울컥해 눈물을 훌쩍거리며 눈물인지 국물인지 알 수 없는 소고깃국을 삼켰다.

그러면 목사님은 나의 등을 다독여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강석아, 울지 말고 많이 먹어라. 앞으로 큰일 하려면 건강해야 한단다.” 나는 더 이상 울음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서 엉엉 울고 말았다. 그때 뜨거운 소고기 국물을 목젖으로 넘기며 마음 깊이 다짐했다. “나도 나중에 꼭 춥고 배고픈 이들의 배를 따뜻하게 채워주고 외로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리라.”

훗날 목사님은 정치적인 간계로 학교에서 밀려나야 할 상황이 됐다. 목사님은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내려놓고 미국으로 떠나셨다. 미국으로 가시면서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말씀을 남기셨다. “첫째,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진실한 목사가 돼라. 둘째,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영혼을 사랑하는 목사가 돼라. 셋째, 앞으로 절대로 정치하는 목사가 되지 말고 언제나 사랑하고 섬기는 종이 돼라.”

그때 내 나이 스물 하나였다. 목사님께서는 세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시고 자신의 책을 선물로 주시면서 이렇게 적어서 주셨다. ‘존경하는 소강석 목사님 혜존, 부디 큰 종이 되소서! 작은 종 박종삼 목사 올림’. 나를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니 어떻게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

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가 돼 4, 5수 한 끝에 미국 비자를 내 목사님을 뵙기 위해 미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목사님은 필라델피아의 한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었다. 내가 목사님의 묘지 앞에 엎드려 서럽게 울자, 옆에 계시던 노 사모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소 목사, 미안해.” “사모님, 무슨 말씀이세요?” “그거 있잖아. 소고기 건더기 사건….” “아이고, 사모님 별 말씀을요. 전 기억도 안 납니다.” 그 후로도 필라델피아를 갈 때마다 꼭 사모님을 찾아뵙고 인사하고 용돈을 드리고 온다.

고 박종삼 목사님은 잊을 수 없는 은인이요, 영혼의 아버지요, 가장 위대한 선생님이셨다. 최근 한국은 국정농단 사태로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겪고 있다. 국가지도자가 청년시절에 받은 아픈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사술과 사교를 행하는 한 사람에게 혼미케 돼 지금은 온 국민이 집단적 상처를 받고 분노하고 있다. 그분이 정상적인 종교지도자나 바른 선생님을 만나 상처를 치유받고 올바른 길로 인도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더욱더 박 목사님이 그리워진다. 지금 박 목사님이 살아계신다면 상처받은 국민, 상처받은 지도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 선생님, 목사님, 아, 나의 그리운 영혼의 지도자여.

소강석 < 새에덴교회 담임목사·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