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룡, 그 누구도 경제·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으로 국가 리더십이 붕괴된 상황에서 자칭 여야 대선주자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당을 떠나는가 하면 대통령 하야 서명을 받기 위해 거리로 나간 주자도 있다. 또 대학 특강, 시국대화,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대권주자로서 존재감 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내년 대선을 겨냥한 행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들 중 어려움이 가중되는 한국 경제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백가쟁명식 ‘말폭탄’을 쏟아내면서도 위기에 빠진 경제를 걱정하지도,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고 있다. 소비심리는 극도로 위축되고, 수출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다 내년 1월20일 출범할 미국 ‘도널드 트럼프호(號)’의 거센 통상 압력이 예고됐음에도 애써 귀를 막고 있다.

풍전등화라고 외치면서도 경제·안보가 어찌 되든 ‘국가 난파선’ 앞에서 선명성 경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일자리를 늘리고 성장률을 높이는 방책보다 경제민주화나 돈 쓰는 인기 영합적 약속에 매달린다. 정책 대결은 뒷전이고, 대선 유·불리 셈법만 난무한다. 이 때문에 잠룡이 아니라 ‘잡룡’으로 불러야 한다는 경제인들까지 있다.

잠룡들은 난국을 헤쳐나갈 로드맵과 비전은 제시하지 않은 채 표가 되는 정치싸움에 치중하고 있다. 같은 당 대선주자끼리도 선명성 경쟁이 치열하다. 사태를 주도적으로 수습하는 ‘무버’가 아니라 ‘촛불’에 따라가는 ‘팔로어’에 머물러 있다. 위기의 진앙지는 박근혜 대통령이지만 잠룡들도 물길을 트기보다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비판마저 나온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리더는 많은데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며 “대통령은 속수무책인데, 각 정파 지도자는 각자도생, 아전인수이니 이게 바로 나라가 기울어지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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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룡, 그 누구도 경제·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과 관련한 문건 유출 파문이 터진 지 한 달 넘게 대선주자들은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위기 수습은커녕 혼선만 부채질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리더십은 완전히 실종됐다.

새누리당 주자들은 당내 갈등을 정리하고 여당의 기능을 작동시키기 위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야권 잠룡들은 촛불집회에 얹혀가며 자기 장사에 열을 올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연 정책 경쟁은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다. 탄핵 이후에 앞당겨질 수 있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안보 정책 등에 대한 검증의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잠룡 단체장, 온통 중앙정치 관심

여야 대선주자들은 정국해법을 놓고 정제되지 않은 발언을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최순실 사태가 터지자 대통령 즉각 사퇴, 임기 보장을 전제로 한 2선 후퇴, 탄핵, 거국내각 구성 등 다양한 목소리가 백가쟁명식으로 나왔다.

야당 주자들은 연일 발언 수위를 높이면서 선명성 경쟁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재명 성남시장이 일찌감치 대통령 탄핵·하야 주장을 하면서 불을 댕겼다. 이 시장은 지난 22일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을 직무유기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10일부터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거리로 나가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탄핵·하야에 비교적 신중한 반응을 보인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뒤늦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는 대통령에게 국군통수권까지 내려놓으라고 요구해 위헌 시비를 낳았다. 최근 박 대통령의 명예로운 퇴진을 보장하겠다고 하자 국민의당은 “벌써 대통령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판했다.

문 전 대표는 특권세력과 일반국민, ‘금수저’와 ‘흙수저’ 등으로 진영을 구분하는 발언을 하는 등 연일 보수세력 공격에 앞장서고 있다. 24일엔 “세월호 7시간 의혹을 박 대통령이 스스로 밝히지 않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탄핵 사유”라고 공격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2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퇴진과 내각 총사퇴’를 주장해 ‘대선 행보’라는 비판을 받았다. 박 시장은 탄핵, 하야 등을 놓고 민주당이 우왕좌왕하는 것은 문 전 대표의 책임이라고 견제구를 날렸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킹 메이커’로 선회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탈당 가능성을 열어놓고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추진, 새로운 역할을 찾는 모양새다. 새누리당을 탈당한 남경필 경기지사는 제3지대 입지 넓히기에 나섰다. 새누리당의 다른 잠룡들은 위기 국면에서 의미있는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정책보다 ‘최순실 대응’ 부심

탄핵안 발의에 속도가 붙으면서 이르면 내년 6, 7월 대선이 치러질 수도 있다. 대선주자들은 최순실 파문에 묻혀 경제 분야 등 정책엔 관심이 멀어진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최순실 사태 등 내외 변수들이 겹쳐 경제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고, 정부는 내년 경제정책 방향조차 수립하지 못하면서 성장 엔진이 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대선 1년을 앞둔 시점에서 정책 아젠다 제시 경쟁이 벌어졌겠지만 각 대선주자 캠프는 정책 준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최순실 파문’ 대응 전략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그나마 지금까지 준비한 것은 돈을 벌고 일자리를 창출할 정책이 아니라 돈 쓸 정책들 위주다. 특히 야당은 경제성장보다 경제민주화나 증세 관련 법안에 집중하고 있다. 문 전 대표는 지난달 6일 싱크탱크 창립 준비 심포지엄에서 “기업 특권·지배구조를 손보겠다”며 재벌개혁을 화두로 던졌다.

민주당은 여권의 혼란을 틈타 법인세 인상 법안과 대기업 총수 견제를 강화하는 상법개정안, 공정거래위원회 전속고발권 폐지와 관련한 공정거래법안 등을 정기국회에서 처리할 태세다. 내홍을 겪고 있는 새누리당은 속수무책이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