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종교개혁 앞장선 루터, 그에게도 '흠' 은 있었다
부패는 개혁을 부르기 마련이다. 16세기 로마 교황 레오 10세의 사치는 극에 달했고, 바티칸 재정은 금세 고갈됐다. 성직 매매가 횡행하고, 성직을 사려는 귀족들은 은행가에게 막대한 돈을 빌렸다. 성직자들은 빚을 갚기 위해 교황청으로부터 죄의 벌을 면해줄 수 있는 권리를 얻어 ‘면죄부’를 팔았다. 독일 수도사 마틴 루터는 타락한 가톨릭 교회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1517년 10월31일 독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인류사를 바꾼 종교개혁의 시작이다.

저명한 역사저술가 제임스 레스턴은 《루터의 밧모섬》에서 대중의 눈높이에서 종교개혁가 루터의 생애를 되돌아본다. 1521~1522년 루터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절체절명의 시기에 그가 고뇌하고 결단한 순간들을 한 편의 소설처럼 풀어냈다.

루터는 사제들의 돈벌이에 이용되는 의식이 믿음보다 중요해진 세태를 비판했다. 그는 신자들이 수도자와 사제 못지않은 힘을 갖고 있으며, 면죄부를 사는 데 돈을 낭비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교황청과 성직자는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루터를 ‘수도사의 탈을 쓴 악마’로 표현했다. 레오 10세는 보름스 칙령을 통해 “루터는 이단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라며 “누구도 그를 숨겨줘서는 안 되며, 그를 추종하는 자들도 유죄가 될 것”이라고 발표한다.

루터는 이 칙령을 피해 ‘가짜 납치작전’을 벌인 뒤 독일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신한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밧모섬’에 빗대 말한다. 밧모섬은 요한이 계시록을 썼다고 전해지는 그리스의 외딴 섬이다.

그는 이곳에서 조력자들과 편지로 소통하며 자신의 주장을 널리 알리는 한편 독신생활과 욕망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는 “성경 어디에도 사제들의 독신을 지시하거나 결혼을 금지한 부분은 없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영향을 받아 1521년 5월부터 가톨릭 사제들이 처음으로 독신서약을 깨고 결혼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루터를 마냥 성인으로 미화시키지 않는다. 그는 엉성한 논리로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멜란히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대담하게 죄를 짓게. 설령 우리가 하루에도 백만 번 간음하고 살인한다 하더라도 죄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파괴하지는 못한다네.” 몇 년 후 독일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대목은 군인들의 끔찍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